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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노트

태지오빠가 가르쳐 준 것

로얄곰돌이 2014. 10. 18. 23:51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서태지, 아니 태지오빠는 로얄이가 유년시절을 함께 뒹굴면서 보낸 존재다.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태지오빠, 태지오빠" 노래를 부르고 다녔으니, 20년 넘는 세월동안 태지오빠 목소리를 듣고 태지오빠 얼굴을 보고 서태지와 함께 자란 셈이다.

당시에는 어떨 땐 우악스럽기까지한 언니들이 무섭고 또 지하철 타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TV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없는 용돈 모아서 잡지 사고 브로마이드 모으고 테이프를 주구장창 들었다. 그래서 노랫말 하나하나, 드럼이든 베이스든 음 하나하나를 모조리 기억했다. 오늘도 박자 하나 안 틀리고 서태지와아이들 시절 곡을 기억했던 걸 보면 참 많이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공연이 열리는 잠실 주경기장에 들어서서 보니 어쩐지 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과거에는 주경기장 5만석 아니 10만석이라도 매진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태지오빠 공연인데, 스탠딩, 1층 좌석을 빼고는 텅 비었다. 세월은 흘렀고 서태지는 이제 문화 대통령이 아니고 팬들은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느라 이제는 태지오빠 공연 날짜도 잊어버린 듯했다. 은행 앞에 새벽부터, 아니면 그 전날 저녁부터 몰려가서 줄을 서던 장관도 이제는 보기 힘들겠지. 

어쨌든 태지오빠는 예전보다 더 그득한 음을 들려줬다, 드럼 베이스 기타 등등 뭐 하나 꽉 차지 않은 부분이 없다고 해야 할까. 서태지는 서태지다. 또 정말 한풀이라도 해주듯이 옛날 추억들을 노래했고, 빠순이는 20년을 오늘 다시 한번 사는 느낌을 받았다. 노래 하나하나마다 로얄이의 사연이 깃들어있고, 당시의 로열이의 삶이 있다. 로열이의 인생에는 태지오빠 노래가 언제나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보다 더 서운한 감정이 들었던 때가 있었는데, "90년대 스타들, 하늘의 별이었던 이들이 팬 여러분들과 함께 저물고 있다"는 발언을 했을 때다. 아, 우리가 저물어가고 있구나.

너에게를 미성으로 부르지 못하는 태지오빠, 카메라를 밑에서 잡으면 주름진 살집이 살짝 드러나는 중년, 맞는 얘기긴 하다. 그도 나도 늙었고, 우리는 젊음을 10대와 20대에게 내줬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20년 전과 똑같았고 나도 같았다. 여전히 시대유감을 부르면서 벅차올랐고 교실이데아를 부르면서 포효했다. 그도 나도 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또 로얄이는 태지오빠가 했던 말을 실천하려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돌이켜 보면 그랬다. 1994년, 3집으로 돌아 온 태지오빠는 좀 더 멋있어졌다. 앳된 얼굴에 축농증 때문에 콧소리 내는 건 여전했지만 뭔가 좀 달랐다. 이제는 "사랑을 하고 싶어" 또는 "난 그냥 네게 나를 던진거야" 뭐 이런 사랑타령을 읍조리는 게 아니라 무게가 느껴지는 말들을 했다.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멜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이 말이 겨우 국민학교 5학년짜리 로열이 같은 꼬맹이나 또는 철모르는 중고딩 빠순이들한테 꽂혔다고 하면 오버일까. 하지만 오빠가 이 말을 하면서 빠순이는 바뀌었다. 시대유감 사태, 음악저작권협회 사태 등등 빠순이들은 서태지와 함께 어떤 권력에 맞섰고, 승리를 쟁취했다. 그 결론이 겨우 시대유감 싱글 앨범 발매라든가, 음악 저작권협회 규정 변경이라든가 우리의 상대가 그렇게 대단한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을지라도, 참 사소한 것일지라도 빠순이는 투쟁했고, 이겼다.

빠순이들은 비록 지금은 결혼 준비로 바빠서, 시댁친정 챙기느라, 애 밥 주느라, 주말 근무하느라, 당장 내가 건사하지 않으면 안 될 이러저러한 일들 때문에 공연장에는 못 왔지만 어떤 일에든 그 승리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로얄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당장은 못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사회를 바꾸고, 내 주변을 바꾸고, 나를 바꾸기 위해서 행동할 날이 올 거라고 믿는다. 승리해 본 사람은 싸우는 법을 알고, 이기는 법을 알고, 쉽게 져주지 않으니까.  

오늘도 또 다시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느냐"고 호통 쳐준 태지오빠에게 또한번 고맙다.  

​p.s 태지오빠가 애 아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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