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여행할 권리, 김연수 본문
작년 하와이에 갔을 때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풍광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한가로운 와중에 휴양지는 북적여서 마음이 괜히 설레였고 음식들도 맛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기분이었다. 차를 달리면 쌍무지개가 뜨고 해는 쨍쨍하고 아침 저녁은 선선했다. 하와이 공항이 있는 오아후 섬은 어디서 출발하나 한 시간 반 이내로 닿을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짧은 일정인데도 섬을 한바퀴 다 돌았다. 그게 참 좋았다.
그런데, 그게 참 좋았는데 그 섬에 머무른지 한 일주일이 지나면서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계 어딜 가든 5~6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곳, 하늘길이 막히면 도저히 나갈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종의 감옥 아닌가. 한 시간만 차를 타면 국경이었지만 국경을 내 다리로 넘을 길은 없었다.
한국은 하와이보다 큰 섬이다. 대륙 끝에 붙어 있지만 육로로는 국경을 넘는다는 건 이제는 점점 상상 속에서도 사라져간다. 매년 여름이고 겨울이고 비행기 탈 날만 기다리는 건 어떻게든 한국말을 하는 한국 사람들을 떠나 나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새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 때문일 게다. 어렸을 때 외국인이랑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미 내 머릿속에 굳어져 있는 생각들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이야기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연수는 국경을 넘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은 다른 차원으로 접근 한다. 국경을 넘되 국경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국경을 넘지 못했지만 국경을 넘은 사람들에 대해. 작가에게 국경이란 단순하게 여권을 보여주고 도장을 받고 지나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중국의 조선족자치구에서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사는 건 국경을 넘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재일교포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 고향 오사카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해외에 나가서도 국내용 소설을 쓰는 작가는 국경을 넘은 것인가 넘지 않은 것인가 묻는다. 물리적인 선이 아니라 상식과 관습과 공동체가 공유하는 세계관 등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국경을 넘었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그래서 문학이 세계의 끝을 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에 한층 의미를 부여한다. 몸이 국내에 있든 국외에 있든 상관 없이.
이 의견은 최근에 잠깐 들춰봤던 무라카미하루키의 <잡문집>에 수록된 '우리가 살아가는 난처한 세상'을 읽으면서 적어뒀던 글귀랑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우리네 세상사의 대부분에는 결론 따위가 없다. 특히 중요한 문제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해진다. 직접 발로 뛰면서 1차 정보를 많이 수집할수록, 취재에 시간을 더 투자할수록 매시의 진상은 혼탁해지고 방향을 잃은 채 어지러이 내달린다. 결론은 멀어져가고 시점은 이리저리 갈린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어쩔 줄 몰라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어느 쪽이 앞이고 어느 쪽이 뒤인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한 혼탁을 헤쳐나가지 않고는 결코 보이지 않는 정경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 정경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설령 눈에 들어온다고 해도 그것을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말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은 어무나 어렵다. 그러나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글이 나올 리 없다. 왜냐하면 글 쓰는 이의 역할은(그것이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원칙적으로) 하나의 결론을 전달하기보다는 총체적인 정경을 전달하는 데 있으니까.
얼마 전에 로얄이를 아끼는 한 선배가 로얄이에게 가장 아쉬운 점 딱 하나를 고르자면 '깊이'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요즘 읽은 작가들이 각자 표현법은 다를지언정 치열한 고민을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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