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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노트

노예 12년을 보고 (스포 있음)

로얄곰돌이 2014. 4. 6. 23:29

솔로몬 노섭(노예명 플랫)은 "나는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노예로 끌려가 12년을 고생하게 되는데, 그가 그 끔찍한 노예제를 벗어나게 된 유일한 수단이 '자유인' 증명서라는 게 아이러니다. 플랫이 다시 솔로몬 노섭이 되던 날, 동료 노예이자 주인의 성적 노리개이자 집착의 대상, 그리고 안주인의 질시의 대상인 펫시가 플랫을 꼭 안고 가장 먼 발치까지 나와 그를 배웅한다. 그 농장에서 가장 가여운 인물이다. 이제는 솔로몬이 된 그가 자신들을 해방시켜주러 다시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노섭은 원래 가난한 흑인으로 굶주리며 사는 것보다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주인 밑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12년간 노예 생활 이후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과 인신매매범들을 형사처벌 해달라고 고소한데 대해 검찰이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는걸 보고 비로소 구조적인 문제점을 깨달았다고.

 

로얄이가 한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당해보기 전까지는 몰라"였는데, 수정한다. "당해봐도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몰라."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내게 그게 잘못됐다는 걸 가르쳐주지 않으면 도무지 진실은 알 수가 없는 게 사람이다. 솔로몬 노섭 역시 1840년대에는 그게 그냥 세상의 진리인줄로 믿었을 터다.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에피소드는 암스비와 진실공방을 벌이던 모습이다. 감독관 출신인 백인 암스비는 어쩌다 노예가 돼 플랫과 같은 농장에 오게 되는데, 플랫은 그에게 동류의식을 느끼고 (플랫의 당시 계급 인식은 백인-흑인 이중 구분이 아니라 자유 백인-자유 흑인-노예 백인-노예 흑인이었던 것 같다.) 북부 지인들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암스비는 이를 바로 주인에게 고자질하고 플랫은 암스비가 감독관이 되고 싶어 꾸며낸 말이라고 좀 더 그럴듯한 설득을 하고 목숨을 부지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주인의 마음에 더 드는 말을 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한국은 구한말 노예해방 이후 노예제도는 사라졌다. 하지만 착취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자본주의가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노예가 스스로를 노예라 자각하지 못하고 자율적이라고 믿게 만드는 경영 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 1920년대부터 일제가 문화통치를 했다고 해서 식민지 상태가 끝난 건 아니듯이 말이다.

 

과거 노예제 하에서는 주인 심부름을 갈 때 항상 누구의 노예인지를 알리는 목줄을 차고 다닌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본주의 자본권력의 노예들 역시 목줄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국내 1등 기업이라는 곳은 심지어 그 목줄에 RF칩을 넣어 동선 파악까지 가능하다고 하니 플랫처럼 길을 벗어나 종이 갈피를 따로 챙겨두거나 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오로지 주인의 맘에 들기 위한 거짓말도 난무한다. 조금 더 자극적이고 극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청와대에 입성했던 윤창중 사례, 뿐만이랴.. 대기업 CEO가 내뱉는 구라에 뒤통수 맞고 책상 집어 차본적 있는 기자라면 알 것이다. 이 인간이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주인에게 자기 쇼잉을 하는데 급급하다는 걸. 

 

물론 사내 정치에 골몰하는 우리 일반인들은 기성정치인들을 욕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가책을 덜어내는 것 정도만 하는 게 전부다. 자본주의는 플랫이 생각했던 '배고픈 자유인보다 배부른 노예가 되는 게 나은' 세상을 실제로 150여년 후인 현재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소비랍시고 대기업 제품과 대기업 유통점을 맴돌면서 현재 권력이 노예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주는 쥐꼬리만큼의 월급마저도 다시 그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도 벗어나기 힘든 굴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당장의 대기업 위주 소비생활만 바꿔도 세상이 어느 정도는 바뀔거라고 생각한다. 총과 채찍에 대항해 과거 노예가 할 수 있는 건 역시 총을 앞세워 힘으로 맞서는 것이었다면, 돈으로 노예를 부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돈을 이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