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를 아끼고 사랑할 의무가 있다 본문
어차피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발표를 앞두고 우울감이 차츰 차츰 짙어지는 상황이었다. 하필이면 집어든 책이 박경리 작가의 '표류도'였고. 주인공 현회의 삶이 전쟁을 거치면서 굴러 떨어지고, 딸린 식솔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빚을 내 다방을 열고 별 잡것들을 상대하다가, 애정을 느끼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남자에게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을 이야기 하는 대목에서는 꼭 내가 현회가 표현하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 이렇게 우울한 책을 읽으면서 우울한 날을 지나보내자..라고 생각하니까 심란함은 한층 더해졌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뛰러 나갔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니 달리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더라. 나중에 런데이가 맛이 가서 그렇게 됐다는 걸 알았지만 런데이 아저씨가 자꾸 7분대 속도라고 알려줘서 얼마나 속상하던지. 분명 평소처럼 뛰고 숨도 차는데 왜 속도가 안 나니!!!
그렇게 실존하지도 않는 7분대 페이스와 싸우면서 꾸역꾸역 뛰다가, 마지막 1km를 남기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나를 애정하고 예뻐하는데 7분대 페이스건 5분대 페이스건 대체 무슨 상관이냐. 숨차게 달리면서 끝까지 업힐을 뛰어오르고 있는 이 순간, 내 자신이 소중한 거지.' 그랬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합불은 내 밖에 있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 합격이 나도 아니고 불합격이 나도 아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래서 발표 전까지 그냥 합격했다고 생각해버리기로 했다. 떨어지더라도 발표 날 때까진 행복할테니 그걸로 된 거지 뭐.
나는 사주팔자 같은 걸 안 믿지만 성격이 팔자라는 말은 얼추 공감한다. 당장 자리 깔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지인이 매번 나보고 '천복성'이라는 걸 타고 났다고 하는데, 그게 크게 성공은 못 해도 안 망하는 사주라나... 궁할 때 통하는 그런... 살아온 걸 돌이켜 보면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계획대로 해서 계획대로 된 게 도무지 없는데 또 어떻게 저떻게 풀려서 생애의 행복과 불행을 도수 분포로 따지자면 평균적으로 행복 쪽에 기울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뭐가 잘 안 되도 크게 상심하지 않고 다른 걸 한 번 해보는 타고난 기질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떤 힘이 나를 이 세상에 떨어뜨려 놓았든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쩔 도리 없이 나는 나를 잘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건, 어떤 상태에 있건 나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줄 의무가 있다. 예전에는 치명적인 삶을 사는 소설 속 주인공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이만큼 살아보니 그거 하나도 좋을 것 없는 것 같다. 평범한 인간이면 평범하게 굳이 스스로를 고통 속에 던지지 말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요령껏 잘 피해 보면서 하루하루 재밌게 살다보면 언젠간 끝이 있겠지.
'새로 안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페인어 공부 (0) | 2024.11.25 |
---|---|
40대에 직업을 바꾸는 사람들 (3) | 2024.11.21 |
답동성당 (3) | 2024.11.16 |
연속 혈당 측정기 후기 (3) | 2024.11.15 |
죽 쑤기 달인 (4) | 2024.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