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죽 쑤기 달인 본문
아침에 출근하면 제일 먼저 전기포트에 물부터 끓인다. 어제 대충 봐 둔 메뉴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냉장고 스캔 후 그날 쓸 식자재 끄집어 내놓고 물 끓으면 죽을 끓이기 시작한다.
쌀을 전날 불려 놔서 금방 익으니까 끓이는 데 10분, 뜸들이기 5분 정도 해서 15분이면 죽 끓이기는 끝난다. 죽이 끓어오르는 동안 야채 등을 파바박 썰거나 갈아 넣는다. 중간에 몇 번 늘러붙지 않게 휘휘 저어주고 참치액젓이랑 소금 치고 간을 본다. 처음에는 양 조절도 힘들고, 너무 묽게 되거나 너무 되직하거나 편차가 좀 있었는데 요즘에는 얼추 일정해지는 것 같다. 간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봤다.(처음에 소금 양을 많이 늘렸다가 조금씩 조금씩 줄여봤는데 딱히 민원이 없어서ㅎㅎㅎ)
마지막에 불 끄고 참기름 쪼륵 넣어서 저어주면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온다. 죽에 건더기가 너무 없다 싶을 때는 깨를 좀 쳐주면 잘 먹는 것 같다. 이제는 대충 끓어 오르는 시간도 예상 가능해서 넘치지도 않고, 가스렌지 닦을 일도 없고, 냄비에 늘러붙지도 않아서 냄비 설거지도 수월하다. 이제 누가 죽 좀 끓이라고 하면 정말 신속하게 끓일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약 2개월을 평일 아침마다 죽을 끓이면서 떠올랐던 죽에 대한 단상 및 노하우.
본죽은 참 좋은 사업 아이템이다. 식자재를 표준화 하기 쉽고(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도 생물을 쓸 필요가 없고 냉동으로 관리해도 무방한데다 조리사 솜씨가 크게 맛을 크게 좌우하지 않음), 조리 시간이 짧고, 일반인이나 아기나 환자나 다 먹을 수 있는 흔치 않은 요리다.
양파죽, 무죽, 브로콜리죽, 들깨죽, 파프리카죽 등 시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죽들을 꽤 끓여봤는데 의외로? 죽에 넣어서 안 어울리는 식자재가 없는 것 같다.
만일 쌀 불려놓는 걸 까먹었다? 끓는 물을 부어서 쌀을 불리면 금방 불어서 평소보다 한 5분만 더 끓이면 된다.(역시 너무 계획적이고 치밀한 것보다는 까먹고 실수를 해봐야 노하우가 느는 법!)
전복죽은 전복을 볶아서 끓이는 것보다 간 채로 그냥 넣는 게 더 깔끔하고 맛있다. 그냥 넣으면 비린내가 올라올 수 있는데 참기름을 둘러주면 냄새가 싹 사라진다. 전복이랑 참기름이랑 궁합이 잘 맛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미역국 끓일 때도 소고기를 볶은 것보다 안 볶고 넣은 게 더 깔끔했다.(물론 미역은 달달 연기 날 때까지 볶아야 깊은 맛이 우러남. 무죽도 무국처럼 무를 볶아서 끓여야 더 시원하고 맛있다)
그러고 보니 다음주에 시험 발표가 있는데 시험도 죽을 쑤고 아기들 먹을 죽도 잘 쑤고 죽 쑤기 달인이 맞구만.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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