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단감 본문
어떤 걸 좋아하게 된 계기가 그 대상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주변 환경 때문인 경우가 있다. 내게는 한파 속에서 마시는 술, 비오는 날, 달리기와 사이클링, 알고 있는 몇몇 사람 등이 그렇다. 처음부터 좋아했던 건 아닌데, 그것과 관련된 추억들이 쌓이면서 점점 마주치는 걸 즐기게 됐고, 어느새 그자체의 매력에까지 끌리게 된 것들이다.
단감은 아마 스무살 넘기 전에는 누가 깎아서 입 앞에 대령해 줘도 먹을까 말까 한 과일이었을 거다. 맛있게 단 것도 아니고 신 맛으로 자극을 주는 것도 아니고 보기와는 다르게 단단해서 식감이 좋은 것도 아니고 덜 익으면 떫고 냄새도 별로. 과일 가게에 쌓인 단감을 보면서 저걸 돈 주고 누군가 사서 수고롭게 깎아 먹는다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나마 홍시나 곶감이라면 맛이나 한 번 봐주는 정도.
몇 해 전인가, 지은 지 20년이 넘은 소형 아파트에 살았을 때,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길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아주머니가 우체통을 보라는 얘길 하길래 뭔 일인가 봤더니 집집마다 우편함에 단감이 두 개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생전 고지서 말고는 편지 한 통 꽂힐 일 없는 우편함에 옹기종기 들어찬 주홍빛 감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 아파트 단지에는 감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는데 가을이 되면 감을 따서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있었다. 당시에도 감을 별로 안 좋아해서 집에 계속 뒀더니 홍시가 돼서 결국 홍시를 먹긴 했지만 지금까지 정겨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 후부터는 감나무만 봐도 반가웠던 것 같다.
한 때 박막례 할머니 유투브 애청자이던 시절, 맛 잘 알, 음식 잘 할, 인생 통달 박막례 할머니는 다양한 과일을 참 맛있게 드셨는데 그 중에서도 단감을 제일 좋아한다고 하셨다. 단감이 최애 과일인 사람이 있구나! 사람이 좋다보니 나도 단감에 호감을 가졌다. 나는 모르는 맛이 있는 건가 싶었다.
우리 동네 도서관 가는 길에는 과일 트럭이 가끔 서 있다. 새벽같이 부지런히 오시는 건 아니고 어떤 때 오후에 점심 시간 지나고 나서 저녁 되기 전에 떠나버리는 트럭이다. 바구니에 만원어치씩 제철 과일이나 고구마 같은 것들을 담아 늘어 놓고 사장님은 책을 읽고 계신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과일 사라는 말도 안 하고, 그냥 한가로이 앉아 계시는 게 특이해서 나도 저렇게 한량처럼 과일 장사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풍경을 연출하고서. 어느 날 호기심에 한 번 흑토마토를 사봤는데 눈이 확 뜨일만큼 너무 맛있었다. 얼마 전부터 다시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한 김에 보이길래 들러서 사과를 사봤는데 올해 먹은 사과 중에 제일 맛있었다. 사과가 너무 좋아서 여기저기서 사봤는데 그렇게 적당히 아삭하고 퍼석하고 달달하고 과즙 넘치는 사과는 다른 데서 찾을 수 없었다. 오늘도 트럭이 있으면 사과를 사리라 맘 먹고 나섰는데, 나보다 조금 앞서 온 아주머니들한테 사장님이 "오늘은 단감이 참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단감 잘 없어요."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사과를 사려고 했는데... 단감은 이 때 껏 사 본 적이 없는 과일인데... 그래도 오늘은 단감이 맛있다고 하니 단감이랑 사과를 둘 다 샀다. 그렇게 해서 참 달다는 단감을 먹으면서 아, 이제 단감도 좋아하는 과일 중에 하나로 넣어야겠다는 감상이 솟았다. 딱 기분 좋을 정도로 달고 적당히 단단하면서도 말랑했다.
p.s 감 먹으면 변비가 생긴다는 얘길 얼핏 듣고 혹시 설마? 그래서? 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단감은 변비를 유발하는 탄닌 함량이 낮아 오히려 변비 완화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많이 먹어야겠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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