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남영동1985, 정지영(2012) 본문
모든 기억은 한 세대도 지나기 전에 희석되거나 사라진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머니는 빨리 여의었지만 1930년대에 대구사범을 졸업할 정도였으니 부자집 장손으로 모자람 없이 자랐을 게다. 외증조할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부를 유지하려면 친일까지는 아니어도 그때그때 바뀌는 권력에 적당히 아부하면서 치부해온 집안이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외할아버지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가 은행원 생활을 했다. 그러다 외증조할아버지 부음 소식을 듣고 고향에 내려와 보니 친척들이 재산을 다 청산해서 나눠 가져갔고,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그대로 눌러 앉아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외할머니와 결혼한 후에는 장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대를 잇는다는 일념으로 줄줄이 딸만 낳는데 대한 스트레스나 받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우리 엄마도 어린 시절이니까 아마 1950년대나 60년대였던 것 같다. 전쟁 끝나고 얼마 안 됐던 때라 동네마다 '빨갱이 잡으러다니는 아저씨들'이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기억에만 의존한거라 잘은 모르겠지만 경찰인지 방첩대인지 어딘가에 어느날 외할아버지는 끌려갔다가 며칠만에 돌아왔다. 동네 사람한테 업혀 온 할아버지는 하도 두드려맞아서 온 몸이 피범벅이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끌려간 이유는 학교에 '무서운 아저씨들이 와서' 학생들에게(그것도 초딩) "너거 선생 빨갱이제?"라고 묻고 다녔고, 그 중에 어떤 아이 하나가 겁이나서 "네"라고 했기 때문이란다.
다행히 외할아버지는 회복해서 교사 생활을 계속했지만 이후로 우리 외갓집에서는 약 달이는 냄새가 끊어진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매일 강박증 걸린 사람처럼 하루 일과를 꼼꼼하게 기록했고, 또 돌아가실 때까지 선거에서는 무조건 여당, 1번만 찍었다. 혹시라도 다른 번호를 찍으면 누가 보고 있다가 잡아갈까봐 걱정돼서 그랬다고 한다. 고통이 머리에 새겨놓은 트라우마란 그런건가보다.
'남영동 1985'를 보고 온 몸에 힘이 없어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고문 장면을 보는 게 고문이었다. 엔딩 크레딧에 고문 피해자들 인터뷰 영상이 쭉 올라오는 걸 보고 영화관에서 자리를 지키며 앉아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빨갱이'로 몰려 고문 당한 우리 외할아버지가 낳은 자식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강남 사는 자식은 '빨갱이' 찍으면 안 된다며 숱한 고문을 일삼았던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고 한다. 경상도 토박이인 다른 자식들도 빨갱이가 싫어서 당연히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뭐 딸이든 아들이든)인 박근혜를 지지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안의 아이러니가 바로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가족들도 잊고 사는 그 트라우마를 누가 기억해줄 것인가.
외할아버지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적어 놓았던 일기는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누군가가 다 태웠다고 한다. 남영동 수기를 글로, 영화로 남겨 준 모든 사람에게 고맙다. 인간은 여러모로 대단하다.
힘들었지만 잘 봤다. 오늘도 술 좀 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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