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경계 본문
국회 도서관에 다녀왔다. 작렬하는 태양, 새하얗게 빛나는 땅에서 올라오는 김, 선명한 초록빛, 땀. 이런 날 하늘을 볼 때면 생각나는 장면들. 이방인에서 장례 행렬이 뜨거운 태양 아래 걸어가는 모습,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에 등장하는 조각조각 씬들... 그리고 이를 달래줄 수 있을 것 같은 맥주 한 잔. 잔에는 수증기가 닿아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 있어야 한다.
오늘 나는 일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안 하는 것 같은 일을 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일로 만난 것 같으면서도 놀려고 만난 것 같은 사람들이랑 술을 코가 벌게지도록 마시고 새벽에야 집에 들어 왔다. 복날에는 일로 만난 사람들이랑 신나게 서오릉까지 가서 유명하다는 장작구이 닭구이를 먹고 오질 않나. 그리고 난 언제나 책을 한 권씩 들고 다니면서 읽다가 메모를 하기도 하고 내 관련 분야가 나오면 정리도 해보고 그게 아니더라도 곱씹어 보고, 여러가지 내용을 일과 직장, 내가 맡은 분야 사람들에 대입해 본다.
내가 일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이렇게 하는 게 억지로 하는 건지 그냥 습관이 된 건지 좋은지 나쁜지 행복한지 아닌지 경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상태가 돼 버렸다고 할까. 터놓고 말 할 사람이 회사에 있지만 다른 데서는 못 할 이야기가 있고, 직장에서도 밖에서도 만나면 마음 설레고 좋아서 주말에도 보고 싶은 사람들이 역시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일과 자신의 삶과 경계가 뚜렷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에 비춰 보면 난 참 애늙은이 스타일이라고 할까. 그래서 노래방만 가면 7,80년대 노래들을 목놓아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이렇게 생각이 미친 이유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김연수 '지지않는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 기억나는 문장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잡지사 다닐 때 일과 노는 것의 경계가 없던 시절을 묘사한 대목에서 무릎을 탁 쳤다.
앞으로는 이런 날씨라면 위에 열거한 것들과 여의도 국회도서관 앞마당을 나서던 길, 마라톤을 즐기는 김연수까지도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신변에 불어닥친 사건들이랑 또 때마침 날 충동질해준 40대 김씨 아저씨 덕분에 앞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뤄놓거나 굳이 고민하면서 우물쭈물 하지는 않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일단 목표는, 하루에 하나씩 사고 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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