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제주, 등산 본문
재작년부터 제주도 갈 일이 갑자기 늘었다. 그 해 여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더운 날씨 속에서 자전거를 탔었는데, 그 후로 제주도 갈 일이 자꾸 생긴다. 폭염을 견디면서 끝까지 완주한 데 감복해서 설문도 할망이 복을 주신건가.(고맙수다)
이번에는 바닷가는 안 가고 주로 중산간 위로만 다녔다. 제주도는 몇 번 안 가봤을 때는 바다로만 돌았는데, 좀 익숙해지고 나니 자꾸 산이랑 오름에 오르고 싶다.
주말 내내 제주도에 돌풍을 동반한 비가 올거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맑았다.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가도 렌트카 찾고 하면 시간이 금세 흘러간다. 렌트카 셔틀 기다리고 키 받아 나오는 데까지 1시간 정도 걸렸다.(제주도 대중 교통 정비 좀...) 8시 반 넘어 차를 받고 바로 영실코스 찍고 내달렸다. 공항 근처 렌트카 업체에서 영실 입구까지는 또 1시간 가까이 걸린다.
뭐 어쨌거나 영실코스는 정말 멋있다. 초반에는 뭐 이렇게 완만하냐 했는데 경사가 꽤 있고, 무엇보다 병풍바위 올라가는 길은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었다.
바람이 너무 심해서 돌아갈까 생각까지 했는데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꾸역꾸역 올랐다. 원래는 은희네나 모이세 해장국을 한그릇 먹고 등산할까 했는데 오후에 일(진짜 일!)이 있어서 빨리 다녀와야했기 땜에 영실 주차장에서 파는 주먹밥만 하나 사서 싸갔다.
바람 땜에 하도 용을 썼더니 금방 허기가 졌다. 바람을 등지고 눈물 젖은 주먹밥을 먹는데 옆에 아주머니가 한 분 앉더니 참크래커를 하나 주셨다. (고맙습니다ㅠㅠ 참크래커는 고이고이 쥐고 가서 윗세오름 가서 먹었다.)
바람을 헤치고 능선으로 올라가면 꼭 조경을 해놓은 것 같은 길이 나온다. 소나무, 비자나무 등 연둣빛, 초록빛 초목들이 터널처럼 이어지고 그 길을 지나면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고원 평원이 나온다. 다음주 정도면 철쭉이 절정이라던데 아직 산 위는 좀 추워서 철쭉이 별로 안 보였다. 안개도 많이 껴서 백록담 남벽도 어슴푸레하게만 보였다.
시간이 없어 남벽까지는 못 가고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다녀왔다. 올라갈 때 바람 때문에 추워서 좀 내달렸더니 한시간 10분 정도 걸린 듯하다.
내려오는 길은 바람이 더 강해졌는데, 까마귀 한 마리가 바람을 헤치고 가려다 계속 떠밀리는 진기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까마귀는 날개를 바짝 몸에 붙이고 바람을 이기려고 몇 번이나 애를 쓰다가 위로 날아 올라서 다시한번 시도하고, 또 안 되면 밑으로 내려가서 또 다시 시도한다. 바람이 살짝 잦아들었을 때 용케 건너편으로 날아갔다.
오늘은 우연히 지나던 길에 청보리밭을 발견했다. 구름위에서 산책하는 기분을 한껏 만끽했다. 사진 찍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해서 등산할 시간은 없고, 가까운 노꼬메오름에 올랐다. 노꼬메오름은 정상 부근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는데, 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꼭 사운드오브뮤직 마지막 장면 같은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능선에서 보면 오른 쪽으로는 한라산 꼭대기가, 왼쪽으로는 제주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의 절경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