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예수전, 김규항 본문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맘에 안 들면 홍수로 다 쓸어 버리고 노아의 방주만 남긴 거에요?"
"하느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 아니에요? 아무리 우상 숭배를 했다지만 이집트인 장자들만 죽이는 건 너무한 것 같아요."
그리고 가장 큰 의문,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거랑, 우리가 구원 받는 거랑 무슨 상관 관계가 있는 거죠?"
고등학교 때였나, 그저 부모님 따라 쭐래쭐래 성당을 다니다가 귀찮아서 안 가겠다고 주말마다 버티기 시작했을 즈음인 것 같다. 내게 기독교라는 종교는 의문 투성이었다. 성경 공부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기도 했거니와, 교리 시간에 배우는 이야기들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고, 벙어리와 장님이 말하고 눈뜨게 만들고, 앉은 뱅이가 일어서고, 물 위를 걷고... 이런 기적들을 벌이다가 갑자기 인류를 구원하고 죽었다라. 논리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종교가 바로 내가 태어난 후로 믿어 왔던 바로 그 종교였다.(사실은 성당 가라는 아빠랑 싸우다가 만들어 낸 질문들이다.)
그 후 10년이 더 흘렀다. 이제 종교를 제대로 마주 보아야겠다고, 또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때에 용케 추천을 받아 김규항의 <예수전>을 읽게 됐다.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따져 보면 복음 말씀에는 이해 못할 구석이 없다는 게 예수전의 결론이고, 그 당시 사회가 2000년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까지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게 김규항씨의 주장이다.
그리고 10여년 넘게 품고 있던 내 의문 역시 해소됐다.
예수는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56p.
바리사이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그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까지 하면서도 먹고사는 데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나 품위있게 살고 싶은 욕구는 바리사이인들보다 적지 않았지만 먹고사느라고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인들 앞에서 죄의식과 열등감에 젖어야 했다. 바리사이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58p.
운동이 갖는 숙명적인 모순은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기존의 사회체제와 그 사고방식에 이미 깊이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중략)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 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의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중략) 예수는 오로지 제 운동, 즉 '하느님 나라 운동'의 본디 목적과 내용에만 집중한다. 61p.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건 예수의 절절한 삶을,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읽는 이유나 가치를 내팽개치는 일이다. 복음서는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가'를 증언한 책이지 '하느님 아들의 인간 흉내 쇼'를 적은 책이 아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 교회는 그 '시점상의 혼란'을 방기하거나 오히려 부추겨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중략) 무작정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게 하는 쪽이 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복종심을 관리하기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63p.
(열혈당원 시몬에 대한 설명) "열혈당원"은 로마에 대해 무장항쟁을 벌이던 '젤롯당'의 일원을 말한다. 그들은 나중에 벌어진 유다전쟁의 주역이기도 하다(중략) 예수가 젤롯당원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것만 갖고 예수와 그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한없이 유순하기만 한 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중략) 평화란 '온 세상이 잃어버린 조화를 회복하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와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유지되는 조용하고 온순한 상태는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악랄한 형태의 폭력이다. 65p.
너무나 지당한 일은 하나마나 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두 가지 요건을 갖는다. 가장 악한 세력과 갈등하거나 짐짓 적대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인민들에게 존경심과 설득력을 가질 것, 그러나 그 갈등과 적대의 수준은 지배체제 자체를 뒤흔들만큼 심각하지 않을 것. 그 두 가지 요건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것이다. 117p.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못 알아듣는 더 큰 이유는 예수가 이루려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바라는 것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133p.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거슬렸던 건, 바리사이인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바리사이인들의 위치다. 결국 나는 이시대의 바리사이인이 아닌가...참 괴로우면서도 아픈 이야기다. 서평을 좀 읽고 싶어서 여러 블로그를 찾아 보다가 누군가 '조중동 보다 한겨레, 경향에 대해 더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게 맞는 건가'라는 평을 한 걸 봤다. 내 관점으로는 김규항이 해석한 바리사이인은 한겨레도, 경향도 그렇다고 조중동도 아니라 이 시대 건전한 의식을 지닌 식자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남녀평등도 어느정도 이뤘고, 적당히 (월드비전이나 꽃동네 등에) 기부도 하고 살며 길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가끔씩 적선 정도 할 줄 아는 사람들. 뻔뻔하고 정말 나쁜 현 정권과 기득권을 비판하면서 정권 교체를 이루고자 선거에서 꼭 한 표를 던지는 사람들, 그러면서 이 사회의 전복을 두려워하고 이대로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 한편으로는 내가 사회 하층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을 바로 우리가, 내가 바로 반성하고 바뀌어야 할 그들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성경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해서 나에 대한 반성으로 끝난 이 책을 읽은 뒤에 '나도 그러면 전재산을 나누고 진정한 삶을 살아볼까?'하고 재산을 계산해봤다.
결과는.
빚>>>넘사벽>>수입
..... -_-;;
바리사이인이라는 착각도 사치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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