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김지은입니다. 본문
성범죄자 모친상에 대통령부터 온갖 정권 유력자들이 화환을 보내고, 전세계 아동 대상 성착취물을 공유하는 사이트 운영자 범죄인 송환이 불발되고, 3선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를 받자 운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심란하고 잠이 잘 오지 않는 때에는 책에나마 맘을 기대본다. 같은 인간으로 대접 받기가 이렇게 힘든거였나. 우리는 선량한 자들로부터 너무 오랫동안 차별 받아왔다. 서평을 쓰려고 맘 먹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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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를 다 읽고나서는 서평을 꼭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성폭력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저 멀리 국딩(초딩) 시절까지 가야한다. 하교 길에 집에 가다가 만났던 길 물어보는 변태(그 때 성인 남자 성기를 처음 봤다), 길거리에서 웃고 떠드는 우리 친구들을 보고 "보지 만져보자"고 중얼거리면서 다가오던 할아버지, 버스나 지하철에서 공간이 충분한데도 굳이 내 쪽으로 아랫도리를 들이댔던 오조오억명의 추남들. 오죽하면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 별명이 '윤락'이었을까. 복장 지도 한답시고 치마 들추고 만지고 하니까 그랬다. 또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소름돋게 만들던 수많은 손길들. "예쁘니까 손 한번만 잡아보자"라든가 기특하다며 어깨를 슬쩍 쓸어댄다든가 하는 일들은 무시로 일어났다. 그들은 친근감의 표시인양 포장해서 싫다는 티를 내기도 애매한 상황을 숱하게 연출했다.
이 수많은 성추행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신고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처음에는 그냥 얼어서,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민폐일 것 같아서, 한번은 신고 하려고 버스 기사한테 경찰서 가달라고 얘기 했더니 기사 바로 뒤에 타고 있던 다른 승객들이 별 일도 아닌 것 갖고 피곤하게 저런다고 혀를 차대서 그냥 내린적도 있다.
뭐 대단한 사례 고백인 듯 싶지만 사실 친구들과 얘기해보면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고, 오히려 나는 더한 폭력은 당하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였으니 여자들의 세상살기가 얼마나 팍팍하고 더러운지... 이렇게나 다들 당하고 살았는데 제대로된 발화가 최근에야 터져나왔다는 게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말하는 것 자체로 조리돌림 당하거나 직장을 잃게 되거나, 쉽고 값어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는 사회 문화가 이토록 오래 지속돼왔다니. 실제로 내 주변에는 성폭력 신고 후에 직장에서 잘린 여성도 있다(내 전 직장은 참 여러모로 대단하다. 그 분에 대한 2차 가해를 듣고 내가 흥분해서 싸운 적도 몇 번 있다. 그놈의 지라시, 그놈의 소문...) '미투'에는 '용기있는'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다는 게 그 어려움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방증이기도 하다.
'김지은입니다'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을 발화한 피해자의 피해 수기이자 가해자에 대한 처벌기이자 여성들의 연대기다. 제3자의 시각에서 보고자 했지만 어느새 내가 겪은 일을 그도 겪었고, 그가 겪은 일을 나도 겪었더라. 정치집단이 좀 더 강하긴 하지만 어떤 조직이든 조직 보위론자들이 득세하고, 조직 논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개인의 판단력은 점점 흐려지고 고립된다.
사실 가장 어려운 건 내 피해사실을 알리는 게 아니라 고립된다는 두려움일거다. 그걸 이겨내고 세상에 외쳐준 김지은씨에게 고맙다. 김지은씨가 어두운 옷을 입지 않고, 모자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날이 빨리 올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진보'라는 걸 남성 고학력자들의 글로 주로 접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여성임에도 사실 여성문제를 뒷전으로 미뤄뒀었다. 혹자는 '해일이 이는데 조개나 줍는다'라고 폄하하고, 혹자는 '나중에'라고 외쳤던 이슈들이 결국은 내 문제였는데 나는 무얼 바라고 그 대단해보이는 '진보'라는 단어에 갇혀 있었던 건지. 이제는 그 거룩한 문제는 대단하신 분들끼리 해결하라고 하고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가야겠다. 근데 그 거룩하신 분들이 성추행하고, 부동산 투기하고, 자식들 명문대 보내려고 별 짓 다 하더라. 도대체 공공선에 관심이나 있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