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바흐를 치자 본문
피아노 연주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도전하는 곡, 쇼팽 '즉흥 환상곡(Impromptu No.4 in C# minor)'을 연습하기 시작한지 어언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어린이들도 훌륭하게 연주할 정도로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곡은 아니지만 로얄이는 체르니 40번에서 멈춰버린 실력...어릴 적에 조금만 더 열심히 배워서 베토벤이랑 쇼팽까지 진도를 나갔다면 참 좋았겠지만, 모차르트 소나타까지만 치고 콩쿨 한 번 나가보고는 질려서 이제 피아노 연습하기 싫다며 줄행랑을 쳐버렸었다. 참 어리석기도 해라.
그래서 왼손, 오른손 콩나물을 한땀 한땀 읽어가며 치기 시작한지 한 달여가 지났다. 아직도 손가락이 꼬이는 부분에서는 여전히 꼬이고, 틀리는 데서는 또 틀린다. 특히 저 3번째 줄 크레센도(cresc)부터 두 마디는 안 틀리면 뭔가 빼먹은 것 같이 허전할 지경이고, 미스 터치도 여전히 많고 속도도 안 붙고, 왼손 오른손 박자도 고르지 않고(메트로놈 켜놓고 양손 따로 연습할 때는 잘 맞추는 것 같은데 합치면 왼손이 자꾸 오른손 박자를 따라감ㅠ) 벽에 부딪힌 느낌을 받던 차였다. 그래서 악보를 펴 보는 것도 겁나서 괜히 명곡집이나 들춰서 대충 이 곡 저 곡 치다 피아노 뚜껑을 덮는 날이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바흐를 치기 시작한 건 지난 주에 안드라스 쉬프경 리사이틀에 다녀온 다음날부터다. 쉬프경은 바흐 인벤션을 연주하기 전에 이런 얘길 했었다. "요즘에는 아이들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종종 보는데,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고 바흐 인벤션과 신포니아부터 시작해서 공력을(실제로 이런 표현은 안 썼다만) 쌓아가야 한다"라고. 왜냐하면 인벤션과 신포니아, 프렐류드 등으로부터 발전된 기교와 표현력을 활용하는 게 골드베르그 변주곡이기 때문!
그래서 바흐 인벤션을 1번부터 하나씩 하나씩 쳐보기 시작, 오늘 3번까지 쳤다. 물론 3번까지 완성된 연주를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한 곡만 연습하려니까 지겨워서 일단 다음 곡도 치면서 한 곡 한 곡 마무리하자는 생각으로 친거다. 그래서 오늘까지는 1번을 또박또박 미스터치 없이 치고, 2번에서 트릴을 정확하게 치는 걸 중점적으로 연습했다.
그렇게 이틀 정도 바흐만 치다가 오늘 다시 즉흥환상곡을 쳐봤는데, 어? 느낌이 이상했다. 그 안 맞던 박자가 대충 맞아 들어가는 느낌, 얼추 음악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왼손을 여리게 치는 게 힘들었는데 힘도 좀 빠진 것 같고... 이게 바흐의 힘인건가?
앞으로는 연습은 바흐부터 시작하기로 맘 먹었다. 바흐 인벤션을 치고 다른 곡을 칠 때 또 좋은 점을 발견했는데, 하농을 굳이 안 쳐도 손가락이 풀리더라. 쉬프경이 아침에 일어나면 리사이틀 때 첫 곡으로 들려줬던 신포니아 같은 바흐 연습곡을 먼저 연주한다고 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이렇게 놀라운 바흐의 효과를 경험하고 나니 왜 피아니스트들이 궁극적으로 바흐를 완성하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요즘 제일 많이 찾아보는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40대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완성하고 싶다고 했었지. 무식쟁이라 엄청난 기교를 발휘해야 하는 리스트 초절기교도 10대에 포트폴리오에 올렸는데 따박따박 치면 되는 바흐를 왜? 라고 생각했었는데(이렇게 착각하는 데는 주로 듣는 글랜굴드ver.이 너무 쉬워보이게 연주한다는 점도 한 이유임;;) 피아노 연주의 본질은 결국 기본기에 있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기본기가 탄탄해야 변주곡도 단단하게 칠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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