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육아 일기 본문
조카님의 주/보조 양육자인 울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일주일간 육아라는 팔자에 없는 짓을 했다. 다시 말하자면 딸래미가 백수로 놀고 있는 덕분에 부모님이 여행을 가실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 때까지 애한테 매여 있는 건 아니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아파트 입구에 나가서 데려오고, 간식 먹이고 좀 놀아주다가 저녁 먹이고 집으로 돌려보내면 되는 일정이다. 4세 어린이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둘만 지내본 적이 처음이라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놓는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너무 어정쩡하다. 4시반에 돌아오는데 어디 일 보러 나갔다가도 3시만 되면 일어서서 후다닥 돌아와야 한다는 게 좀 스트레스... 오후에 뭘 할 수가 없음.
-간식이랑 저녁 메뉴가 고민스럽다. 달고 짠 거 빼고 유제품 빼고(병원에서 당분간 먹지 말라고 했다고) 먹일만한 간식이 딱히 없다. 그래도 과일을 좀 다양하게 줘보려고 했는데 다 싫다고 해서 맨날 샤인머스캣만 먹였더니 좀 미안하더라. 오늘은 사과를 먹겠다고 해서 다행. 저녁 메뉴도 좀 맛있으면서도 건강한 걸 먹이고 싶은데, 소고기를 구워줘도 잘 안 먹고 짠 것만 찾고(밥에 김자반 뿌려달라, 고기에 소금 더 발라달라 이런 걸로 실랑이) 뭐도 싫고, 뭐도 싫고 아무튼 반찬을 보자마자 "나 이거 이거 안 먹어" 라고 선언하든가 숟가락 위에 올려 놓은 멸치볶음 같은 걸 자기 손으로 막 털어버려서 결국 먹는 반찬이 한정적이어서 좀 걱정.
-애가 폰으로 동영상을 너무 보고 싶어하는데 못 보여줘서 좀 짠하면서도 이걸 앞으로 어떡하나 싶었다. 동영상 많이 보면 고모처럼 눈 나빠져서 눈에 레이저 쏴야 한다고 했더니, 급 겁먹으면서 그 다음부터 동영상 조금만 보겠다고 하긴 하더라. 4살짜리 애한테 너무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줬나 싶기도 하고...
-확실히 몸을 써야 좋아한다. 나름 퍼즐 맞추고 클레이하고 이런 정적인 것도 좋아하긴 하는데 들고 뛰고 해야 신나게 노는 느낌이 든다. 목소리 톤이 확 달라지면서 돌고래 소리 내고 그러니까 몸을 쓰고 싶지만 허리 아프고 체력 딸려ㅠ 역시 애는 젊은 사람이 키워야...
-아이도 타인에게 자기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자기도 나랑 이렇게 둘만 있는 게 처음이니까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엄마가 밥 먹일 때랑 다르게 일어나서 돌아다니지도 않고 평소보다 떼 쓰는 것도 덜하고. 엄마아빠가 고모 말 잘 들어야 한다고 반복 학습을 시켜서 그런 것도 있지만, 뭔가 의견을 조율해 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더라. 너도 사람이고 나름 사회생활 경험이 있구나.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어떻게 지내는지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사회가 형성되고 나름 질서가 있더라. 그리고 자기보다 어린 애들은 아기라서 많이 운다거나 뭘 못한다거나 하는 얘기도 하고ㅋㅋㅋㅋ "이건 아기가 하는 거 아니고, 어른 돼서 해야지" 그랬더니 "나 이제 아기 아닌데? 나 형안데?"라고 받아치는 짬밥이 됐음.
-오 나름 너도 컸구나 싶어서 하루는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놀고, 하루는 고모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놀자고 제안 해봤는데 일언지하에 거절 당했다ㅠ
-좀 피곤하긴 하지만 우리 조카라 그런가 할만 했다. 귀여워서 그냥 다 이쁘다ㅋㅋ 육아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