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헛짓거리 하기 본문
인생에서 해본 헛짓거리를 나열하라고 하면 하루고 이틀이고 읊을 수 있는 사람이 꽤 많을게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내가 정의하는 헛짓거리는 '그 시점에 해야 하는 일을 안 하고 다른 짓을 하는 것'을 말한다.
살면서 아무 할일도 없는 적이 있었던가. 태어나서는 뒤집기와 배밀이, 일어서기 등 과업을 발달시기에 맞게 착실하게 수행해야 했고(그 때 안 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우리 아빠는 발달시기가 지났는데 내 이가 나지 않으니까 헐레벌떡 치과에 쫓아 갔다가 "이 없는 사람 봤어요? 기다리면 다 날걸"라는 핀잔만 듣고 돌아왔다고...)
유치원, 학교, 알바, 직장을 거치는 내내 할일이 없었던 적이 없었다. 공부를 해야 하거나 일을 해야 하거나 일을 쉬면 새로운 일을 준비하거나... 아무튼 돌이켜봤을 때 그 시점에 해야 할 것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그 해야 하는 걸 안 하고 헛짓거리를 종종 하곤 하는데, 일 미루고 인터넷 하거나 TV보거나 책읽거나 청소하는 건 여사인 것 같다. 아 20대 후반부터는 운동이나 여행도 넣어야겠다. 요즘에도 종종 마감도 다 못 끝낸 주제에 그냥 막 차몰고 근교로 떠나기도 하니까.
그런데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정도 먹고 나니까 '모든 일은 이유가 있다' 이런 말이 실감이 나는 경우를 몇 번 겪게 됐다. 지금은 헛짓이라도 나중에는 인생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대학시절 방학 때 우연히 전공과는 아무 상관 없는 식품연구소에서 알바를 했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알바를 시켜준다고 할까 싶을만큼 처우가 안 좋았다. 9-6 8시간 꼬박 일하고 월급은 60만원 남짓 받았다. 김치 담그고 식품들 갈아서 희석액을 만들어 플레이트디시에 균 배양 시키고 하는 일들을 3개월인가 했는데, 다들 왜 그런 일을 하냐고 했었다. 돈도 안 돼, 전공이랑 완전히 다른고 인생에 도움도 안 될법한 일이었다. 이 때 경험은 나중에 생물학 수업 들을 때 도움이 됐고, 기자가 된 다음 관련 취재를 하는 데도 아주 도움이 됐다. 회사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기업 연구소가 돌아가는 방식도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종종 광고를 보거나 마트에 가면 내가 실험했던 제품들이 보이는데, 제조공정을 대충 아니까 믿고 사거나 안 사거나 할 수 있다.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던 헛짓거리도 있었는데, 대학 1학년때 카즈오가 막 해보라고 해서 기사 공모전에 막 대충 써서 지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슈랑 맞물려서 진짜 운 좋게 대상을 받았다. 대학 다니는 내내 나는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안 해봤는데 준비했던 시험에서 미끄러지고, 스펙이라고 할만한 게 너무 없어서 봉사활동이라도 하자 했는데, 막상 갔더니 일반 봉사가 아니라 홍보통신원으로 배정을 했다. 또 취직도 안 되고 돈은 필요해서 인터넷 사람인 같은 데 들어가서 여기저기 인턴 지원 했는데 붙은 곳이 하필 언론사였다. 당시에는 좀 더 적합한 데서 인턴을 해야 하지 않을까? 스펙에 도움되는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오만 생각이 다 들만큼 헛짓거리다 싶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걸로 밥을 먹고 산다.
밉보여서 간 부서에서 맡았던 창업 관련 지식은 실제로 창업하면서 써먹기도 했고, 더 밉보여서 지방발령 가서 광고국과 함께 생활했던 것도 지금 보면 도움이 많이 된다.
어차피 집중력이 약하니만큼 어떤 분야에서 대단한 전문가나 장인이 되지 못할거라면 그걸 목표로 스스로를 학대하느니 그냥 계속 이것저것 헛짓거리 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일 안 하고 블로그에 헛짓거리 하고 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