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피협 5번의 신세계를 경험한 날

오늘은 누구에게라도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다.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이건 떼쟁이 조카건 9층 강아지건 아파트 앞 마당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건 아무나 다 고맙습니다. 세상에 이런 똥손이 없었는데 피켓팅이라는 데 참전해서 얼떨결에 포도알을 하나 잡았다. 꿈이냐 생시냐.. 이번에는 예술의전당 2층. 표를 갖게 된 다음부터 정말 설렜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그냥 기분도 좋고 상쾌하고 모든 게 다 좋았다. 이런 엄청난 공연을 보려고 그랬는갑다.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1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E플랫 장조 Op.73
협연: 임윤찬 
2부: 말러 교향곡 1번 D장조
지휘 & 오케스트라:얍 판 츠베덴 & 서울시향

오늘 공연은 한 마디로 "베토벤님이 의도했던 바를 잘 들려줄테니 이제 '황제'라고 그만 불러라." 라고 요약 해본다. 그동안 들어왔던 황제가 꼭 황제의 즉위식과 황제에 대한 찬양 같이 들렸다면 오늘 베토벤 피협 5번은 발랄하면서도 강렬하고, 진지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재미있고 아름다운, 임윤찬이 새로 쓴 베피협5번이다. 다른 수식어는 거부합니다~

일단 피아노는 셈여림을 최대한 강조하고, 밀고 당기는 리듬감도 최대한 살리고, 일명 '별가루'를 공간 전체에 뿌려서 황홀경을 맛보게 해줬다. 그리고 왼손과 오른손, 내성의 질감을 달리해서 피아노가 또 하나의 팀으로 이뤄진 것 같은 느낌... 천재적인 재능에 엄청난 노력이 이뤄낸 클래식 음악사의 걸작!   

서울시향 연주도 참 좋았다. 1악장 도입부부터 악기들 소리가 꽉 채워지는데다 오케스트라랑 피아노가 피아니시 '시~~~' 모, 포르티 '쾅' 시모까지 정말 다채롭게 조응하면서 물결이 일고 산뜻한 바람이 불고 천둥이 내리꽂다가 햇살이 비치는 변화 무쌍한 연주를 보여줬다. 연주자들이 들썩들썩 리듬을 타는데 나도 일어서서 발재간 부리고 어깨춤을 추고 싶었다. 3악장에서는 지휘자랑 눈 맞추면서 의도한 듯이 약간 익살스럽게 연주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것 또한 하나의 재미였다. 아... 이건 그냥 들어야돼. 말로 다 설명 못하겠다.ㅠㅠ 

광주시향과 통영에서 협연한 베피협 5번을 듣고 너무 색다른 소리에 임윤찬 팬이 됐었다. 소리가 너무 맑고 아름다웠다. 오늘은 그 음색을 살리면서도 좀 더 다이나믹한 연주를 해줬는데 이 또한 신세계라 하겠다. 뇌에서 그 아름다운 음색과 선율이 희미해져가는 게 너무너무 아쉽다. 제발 음원 좀 풀어주세요... 

앵콜은 벨리니 오페라 'Norma'의 Casta Diva 라고 한다. 처음 들어보는 곡이긴 한데 연주가 너무 절절하고 고와서 눈물이 살짝 나더라. 음악 듣고 울고 이런 사람 아닌데 그랬다. 찾아보니 노르마가 적장인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졌다가 배신 당하고, 그가 돌아오기를 달에게 부탁하는 노래라고 한다. 그 애달픈 마음을 표현하려고 한 거였구나... 

두번째 말러 교향곡 1번은 새로운 음악감독 취임 연주회 답게 서울시향의 저력을 뽐낸 연주였다. 일단 악기가 엄청 많아서 무대가 꽉꽉 들어찼다. 그래서 다양한 악기 소리를 경험할 수 있고 재미도 있는 곡. 

1부 베피협 때부터 느꼈지만 얍 판 츠베덴 지휘자가 강약이나 음색 대비를 확실하게 해서 다이나믹한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말러 연주도 그런 재미가 있었다.

누군가 말러 교향곡 1번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있다고 하던데,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배경음이 깔리는 1악장 도입부부터 지금은 인생의 어떤 구간을 지나고 있는걸까 생각하면서 들어봤더니 얼추 유년기, 10대, 20대, 30대가 그려지더라. 마지막에는 여러 곡절을 겪었지만 내 인생은 살아볼만 하고 개척해나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말러 음악이 영화에 많이 쓰이는 이유도 이렇게 음악 위에 사람의 삶을 얹어놓으면 잘 어울리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클라리넷 뻐꾸기는 정말 강렬하다. 아직도 귓전에 뻐꾸기 소리가 멤도네.

사족으로, 말러1번을 이렇게 초집중해서 들어본 건 처음인데, 말러가 인생에 힘든 일이 별로 그다지 없었나? 라는 생각도 살짝 들긴 했다.ㅋㅋ 좀 쓴 맛이 없어.. 3악장에서 갑자기 민요가 가미되는데, 이건 귀향이나 귀촌하는 걸 표현한건가? 싶기도 하고… 또 4악장은 언뜻 독재자가 좋아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라. 음원으로 들을 땐 몰랐는데 직접 들으니까 너무 결연한 것 같어..

아무튼 서울시향 연주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새로운 음악감독을 맞이해서 더욱 탄탄한 실력을 가진 오케스트라가 된 것 같다. 츠베덴 지휘자가 악장 출신이라더니 역시 현악기 사운드는 매우 훌륭! 지휘자가 직접 바이올린 왼손 더 떨라고 사인 보내는 것도 신선했다.  금관악기 소리가 거슬리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공연 끝나고 나오는 길에 관객들이 전부 기분 좋은 얼굴들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참 좋았던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