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미오기전, 김미옥 본문
페이스북을 생각 없이 넘겨보다 우연히 김미옥 작가의 포스팅을 읽게 됐다. 페친 중 누군가가 재밌다고 공유를 했으리라. 처절하거나 빈궁하거나 차별 때문에 치이고 억울했던 여러 삶을 쓰는데, 거기에 익살이 가미돼 슬쩍 웃고 말게 되는 글이었다. 바로 프로필을 눌러서 팔로우를 하고 글을 여러 개 읽었는데 본인 글을 '곰국을 끓인다'라고 표현하고 있더라. 댓글이 기본 100건 이상 달리는 걸로 봐서는 이미 페이스북 유명인사인데 내가 너무 늦게 알아봤던 것.
이 분이 책을 냈다는 소식을 보고 최근 책인 '미오기전'을 읽었다. 누구든, 가난한 사람은 조금 더, 여자들이라면 한층 더 느낄 수 있는 삶의 애환이라는 게 있을텐데 그 애환들을 기가막히게 버무려서 세상 살이가 한 편으로는 서글프면서도 한 편으로는 웃음을 유발하는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연대순도 아니고, 목차별로 주제가 뚜렷하게 나뉜 것도 아니지만 책을 쭉 읽으며 한 인간의 일대기를 본 것 같다. 고생했고, 누군가에게는 상처 받았고, 누군가에게는 사랑과 인정을 받았고, 열심히 살았다. 다독가이자 서평가로 유명한 분인만큼 문학이나 음악에 대한 다양한 지식도 담고 있고, 그러면서도 글이 재미있고 경쾌하게 잘 읽힌다.
한편으로는 자식들 얘기는 좀 길다 싶었고, 나보다 윗 세대 언니들이 직장에서 겪는 애환을 보고는 좀 답답하기도 했다. 지금 같았으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야 할 법한 일들을 당시 여자들은 아무 방패막이 없이 온 몸으로 받아내며 버텼구나 짠하고 고맙기도 하고.
눈길이 멈추는 단락들이 여럿 있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사흘을 앓았다. 사흘째 되던 날 문이 열리더니 밥상이 들어왔다. 매일 그 나쁜 남자에게 얻어맞고 돈 뜯기던 옆방 여자였다. 김치찌개에 냄비에 밥 한 공기였지만 내 평생 그토록 맛있는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밥을 해 먹은 기미는 없고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더라는 것이었다. 내가 멍하니 밥상 앞에 앉아 있으니 문을 반쯤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던 여자가 혼자 먹으라며 나갔다. 배려였다.
나는 맹렬하게 수저질을 했는데 슬프지도 않았건만 눈물이 혼자서 흘러내렸다. 여자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이름은 애숙이고 고향이 전라도 어디라고 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밥 한 공기의 인연으로 애숙이는 가끔 밤 1시가 넘어 내 방문을 두드렸다. 책을 보고 있으면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무슨 책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책 내용을 얘기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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