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새끼발가락이 지배하는 삶(포르투 해안길 5일차) 본문
오늘은 오 세라요 o serrallo에서 사바리스 sabaris 까지 좀 짧게 걷고 길도 좋아서 여유가 있다. 닌자앱 기준 18.3km, 애플워치 기준 20km.
알베르게 문 열기 전에 도착해서 근처 바에 가서 상그리아 한잔(3.5유로) 때리고 와서 샤워하고 빨리 건조기 돌려 놓고 앉아 있다. 몇 킬로 차인데 20키로 이내로 움직이니까 이렇게 여유가 넘친다. 여정이 오늘만 같아라~
스페인에 넘어 오니까 1시간이 빨라져서 해가 더 늦게 뜬다. 오늘 일출 시간은 8시 40분.. 그러나 새나라의 어른인 로얄이는 5시 반부터 일어나서 부스럭대다가(이래서 1인실을 쓴다;;) 7시 좀 전에 길을 나섰다. 어제 너무 고생해서 아침거리를 준비 안 해서 좀 배고프고 초라하게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올라!! 지나가다 첫번째로 지나간 바 주인이 문을 열고 있어서 언제 오픈하냐고 물어보니까 들어와도 된다고 하더라!! (나중에 만난 사람들은 오피셜 길 따라 쫄쫄 굶고 왔다는데 나보고 완전 럭키걸이라며 부러워함ㅋㅋ)
다행히도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쭉쭉 걷다가 공식 오피셜 길인 동산으로 올랐다. 오늘 느낀건데 나는 역시 등산 체질인 듯. 산 타니까 발이 어제보다는 덜 아팠다.
산 타면서 인도네시안-더치 롱키언니랑 독일에서 온 로미나(? 이름이 어려워서 못 외움. 엄청난 tmi를 공유해주기까지 했는데 죄송;)를 만나서 산 꼭대기에서 같이 과자 나눠먹고 바이오나까지 같이 걸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새끼발가락인데, 나의 안위와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를 새끼발가락이 결정한달까. 온 신경이 왼발 새끼발가락에 가 있음ㅠ 다른 모든 곳이 참을만 하고 테이핑 좀 해주고 하면 괜찮은데 왼발 새끼발가락만 끝도 없이 아프다. 한 걸음 걸음마다 새끼발가락을 의식 하면서 걷고 있다. 이 새끼 이름도 새끼발가락인 걸 보면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새끼발가락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본 모양…
어제부터 오늘 출발할 때만 해도 새끼발가락 이 새끼만 없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아까 길 걸으면서 언니들한테 나 발 너무 아프다고 그랬더니 언니들도 나도 아파~!!!라고 반응하더라. 외국인들이라고 다르지 않구나? 내가 발 모양이 이상한 줄 알았더만…
롱키 언니는 쉬었다 다시 걸으면 한 스무 걸음은 쩔뚝 거렸는데 새끼발가락이랑 엄지발가락이랑 전부 다 아프다고, 좀 걷다 보면 통증에 적응한다면서 걸어가더라. 그거 보고 나도 좀 맘을 다시 먹게 되더라. 그래도 아픈데 어쩔겨ㅠ 로미나? 갈 길이 남으면 힘이 남고 목적지 다 오면 지친다고 마음먹기 달렸다고 뭔 도인 같은 말을 하고… 독일 사람 답지 않게 샤머니즘 팔찌라면서 뭘 주렁주렁 차고 있더라니.
암튼 새끼발가락이 더 이상 내 정신을 지배하게 두지는 않겠다고 맘을 먹은 다음 언니들이랑 얘기하면서 걷다보니 그나마 참을만 하더라. 역시 모든 건 마음 먹기 달렸나봐.
오늘 우리 파티의 주제는 이윽고 커피로 넘어갔는데, 다들 대체 왜 이 먼 길에 카페가 하나 없냐며 투덜투덜ㅋㅋㅋ 유럽 언니들은 이 동네 사람들 너무 이상하다 동네에 카페가 없고 아침에 커피 못 마시는 게 말이 되냐 난리다.
여기 푸드트럭이랑 커피 부스 하나 있으면 대박 날거고, 얼마든지 돈 낼 용의가 있고, 어쩌고 저쩌고 궁시렁 궁시렁… 암튼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 사람들 비즈니스 마인드 없다며 욕하면서 산을 금방 넘었다.
바이오나에 도착해서 점심 겸 커피 브레이크 겸 노닥거리다가 4km 남짓 혼자 슬슬 걸었는데 바이오나 근처 해안 경치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왔다. 경치 좋은 벤치에 앉아서 혼자 푹 쉬기도 했고.
오늘 저녁은 여유있게 맛있는 거 먹어야지!
라고 써놓고 나갔다가 식당을 못 찾아서 결국 까르푸에서 이것저것 사다 먹고 있음ㅠ
이놈의 나라는 왜 저녁 8시까지 식당이 문을 안 여냐고! 시에스타고 개나발이고 빨리 쳐먹고 자라 좀. 문 연 타파스 바를 하나 발견해서 넘 신나게 뛰어 갔는데 오늘은 주방장이 없는지 술만 팔고 음식은 안 된다고ㅋㅋㅋㅋ 아오!!! 어쩐지 사람들이 맥주만 마시고 있더라;;
까르푸 오가느라 결국 오늘도 24km 넘게 걷고 말았다.
맨날 1인실에서 자다 오랜만에 알베르게 벙커 침대 왔더니 캐나다에서 온 페레그리노가 내일 국경일이라고 먹을 거 미리 준비해놓으라고 해서 다녀왔다. Senor, muy gracias!! 얼마나 다행인지. 그 아저씨 아니었으면 내일 쫄쫄 굶을 뻔 했다.
아무래도 까미노 걸으면서 스페인 맛집 가서 먹기는 힘들 듯. 9시~10시에 자는데 8시에 문 여는 식당을 어떻게 다녀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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