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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꼭대기 알베르게에서의 인연(포르투 해안길 3,4일차)

로얄곰돌이 2022. 10. 11. 06:00

보통 순례자 숙소로 불리는 알베르게는 까미노 길 옆에 있다. 순례자들을 위한 곳이니 순례자들이 가장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곳에 있는 게 정석이니까.

그런데 가끔 완전히 길에서 동떨어진 산 중턱이나 산 꼭대기에 있는 알베르게들이 있다. 3일차에 묵었던 Viana do Castelo 의 Santa Lucia 성당 알베르게가 딱 그런 곳이다.

23킬로 정도 걸어와서 이 다리 위에서도 드러누울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는데, 내 숙소는 저기 산 꼭대기에 있구나…


보통 3일차에는 다들 거리를 조금씩 늘려서 Vila do conde 부터 26km 정도를 걸어서 비아나 두 카스텔로까지 가는 경우가 많은데(길에서 만난 사람들 전부 목적지가 비아나 두 카스텔로였음. 출발지는 빌라 두 콘데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25km 넘게 걸어야 하는데다 산 위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나 경사 엘리베이터가 운행을 안 하는 요즘 시기에(택시 기사 얘기로는 지금 수리 중이고 11월에나 다시 운행한다고 함) 산타루치아 알베르게까지 간다는 건 웬만한 미친놈 아니고서야 잘 감행하지 않는다.

나는 케이블카든 엘리베이터든 하나는 있는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안 하길래 그냥 택시를 탔다ㅠ; 사족인데, 나보다 한시간 후에 도착한 영국 애들(미키, 앤드루, 잭 세 친구들인데 좀 늙어보이는 앤드루 말고는 다들 넘 귀여웠음)은 계단으로 올라왔다더라. 역시 젊은 게 좋은 건가… 나는 그냥 택시 탔다니까 자기들은 그건 옵션에 없다고ㅋㅋㅋ 뭔가 꼭 걸어서 가야 한다는 그런 원칙 같은 게 나름 있나봄. 내일도 Caminha나 A guarda까지 비 맞으면서 갈거란다.

아무튼, 올라가기 전부터 뭔가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굳이굳이 아픈 다리를 또 끌고ㅠ(아프다면서 왜 맨날 20킬로씩 걷는건데..) 핑고도세(Pingo-doce)에 가서 저녁 거리랑 내일 아침 먹을거랑 팩 와인이랑 주섬주섬 사가지고 산을 올랐다. (여기서 파는 대구살 크로켓 완전 존맛인데 그걸 포르투갈 마지막 날에야 알았음ㅠㅠ 풀풀 날리는 쌀이긴 하지만 밥이랑 약간 깻잎같은 채소 삶아서 무쳐놓은 것도 파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다. 내일 비온대서 먹고 죽자 생각하고 와인을 좀 많이 샀는데 정말 잘 한 일임)

근데 거기까지 올라온 용자들이 나랑 영국팀 말고도 또 있었으니, 캐나다 교포 언니들이시다. 50대, 60대인데 산 탈 생각을 하신 분들.(물론 케이블카 없어서 택시 타고 오시긴 했지만) 레지나, 레아 언니들인데 ‘조선말’ 쓰시는 분들이고, 캐나다 생활 이야기, 한국 이야기 하면서 와인 파티를 했다. 초라한 안주지만 산딸기랑 이런 거 놓고 어찌나 재밌게 수다를 떨었는지, 안 그래도 텅 빈 알베르게가 떠나가라 웃고 떠들었다.

산타루치아 성당. 비아나 두 카스텔로의 랜드마크. 성당 안팎이 참 아름답다. 알베르게도 깔끔하고 시설도 좋다.


힘든 길을 걸어왔고 또 긴 여정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지애에 같은 말 쓰는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까지 겹쳐서 그런가 뭔가 마음이 더 뜨끈뜨근 해지는 게 있었다. 레아 언니는 심지어 캐나다 가기 전 한국에서 직업도, 대학 전공도, 가족관계도 나랑 공통점이 너무 많아서 정말 신기하더라. 언니들은 시간이 없어서 레돈델라까지 점프를 하신다고 해서 발렌사행 기차를 같이 타고 갔는데, 기차에서 헤어지기 아쉬워서 막 끌어안고 나올 정도로 정을 많이 나눴다.

언니들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뭔가가 정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 언니들 같은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길을 걷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했으면 좋겠고, 잘 완주했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

3,4일차를 요약해보면
3일차: 빌라 두 콘데Vila do conde -> 비아나 두 카스텔로 Viana do castelo 공식 앱 기준 26km 지만 애플워치 기준 30.8km 걸음.

3일차 빌라 두 콘데에서 비아나 두 카스텔로까지는 논 오피셜 해안길이랑 오피셜 마을길이 있는데 다시 간다면 무조건 논 오피셜 해안길로 갈거다. 마을길 걷다 왼쪽 발바닥이랑 발목이랑 다 상해서 계속 고생하고 있음ㅠㅠ 돌바닥 정말 무시무시하다. 왼발이 아치가 많이 낮은, 평발에 가까운 모양인데 돌길 걸었더니 발가락부터 발바닥, 복숭아뼈까지 너무너무 아팠다. 어제 그 길 걷고 난 다음부터 왼발 때문에 계속 아프고 속도도 안 나고 너무 힘들다ㅠㅠ내가 너무 빨리 길을 나서서(6시반에 출발) 몰랐는데 나중에 들으니 순례자들 대부분 해안길을 걸었다고 하더라. 3일차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산길을 타고, 산, 마을을 둘러둘러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산을 내려와서 다리를 건너면 비아나 두 카스텔로에 도착한다.

괜히 새벽에 나가서 혼자 오피셜 돌길 걸음ㅠ
새벽부터 걸으니까 오전 8시도 안 돼서 배고팠다. 오픈 시간 안 됐는데도 커피랑 빵 팔아준 고마운 가게.
지긋지긋한 돌길.
산길로 들어서면 돌다리도 건넌다.
오아시스 만남! 아저씨들 모이는 동네 간이 바 같은 덴데, 저 분들은 영어를 못하고 나는 포르투갈어를 못하지만 다같이 떠들면서 의사소통한 덕분에 시원한 음료수를 마실 수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한 기부제 휴게소. 처음에 바나나 하나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빵이랑 음료수랑 골고루 먹고 옴; 계속 1유로, 1유로 넣다보니 1유로 짜리를 다 써서 나중에 세탁기를 못 돌렸다.


4일차: 비아나 두 카스텔로-> 국경인 까민하 Caminha 까지 기차로 점프 -> 보트 타고 미뉴 강 건너 스페인 A paxase 로 이동 -> 아 팍사세에서 오이아Oia 까지 도보 이동 -> 오이아에서 아 세라요 A serrallo까지 택시 이동 해서 걸은 건 22.6km (오이아에서 묵으려고 했는데 알베르게가 풀부킹 됐다고 해서 부킹 닷컴에서 다른 숙소를 예약한다는 게 4킬로 더 떨어진 세라요에 있는 곳을 예약해버림ㅠ)

4일차에 원래 걸었어야 할 비아나 두 카스텔로-> 아 과르다는 30km가 넘는 장거리이고, 30km를 걸어 통과했다는 후기가 꽤 보이는데 이건 정말 튼튼하고 하자 없는 다리와 발을 타고난 사람들 얘기고, 조금이라도 걷는 데 지장이 있다면 불가능한 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비아나 두 카스텔로 역에 가보면 배낭 맨 사람들이 꽤 있는데, 나처럼 까민하까지 점프해서 보트 탄 사람도 있고, 내륙길로 가려고 발렌사Balenca 거쳐 뚜이Tui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아나 두 카스텔로역으로 들어오는 발렌사행 기차. 연착이 잦다더니 진짜 연착함.


보트를 타고 스페인으로… 차까지 실어 나르던 페리가 문을 닫아서 6인승 보트가 사람들을 실어날라준다. 예약 안 하고 현장 결제 해도 됨. 6유로.

보트를 타고 미뉴 강을 건너면 스페인이다. 안녕 포르투갈!! 보트에서 이탈리아 아주머니가 포르투갈아 고맙다! 라고 외쳐서 다같이 깔깔 웃으면서 왔다. 이 아주머니가 스페인은 한 시간 더 빨라진다고 해서 다들 시계랑 핸드폰 껐다 켬ㅋㅋ

이쪽이 스페인.
복숭아뼈랑 새끼발가락 물집 잡힌 데가 아파서 일단 샌들 신고 걸었다.

스페인에 들어서면 스페인 같다. 까미노 표지가 달라진다. 곳곳에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고, 노란 화살표도 정말 많고, 예쁘게 장식한 화살표나 조가비 표식도 많다.

여긴 스페인!이라고 주장하는 까미노 표식. 듣던대로 스페인은 화살표가 정말 많아서 앱이 필요 없고, 저렇게 산티아고까지 거리도 알려준다.


보트를 내린 A paxase 에서 노란 화살표를 따라 동산을 하나 넘으면 아 과르다 A guarda 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대서양을 낀 제주도 풍경이 펼쳐진다. 제주도랑 바다가 정말 비슷하긴한데 오른편 산의 식생이 많이 다르고 지붕이랑 집 꾸며놓은 모습들이 달라서 아.. 그래도 스페인이구나 유럽이구나 하면서 걷는다.

성산 de A guarda 풍경. 모퉁이 돌면 섭지코지 있을 것 같은 느낌…


스페인 사람들은 듣던대로 친절하고, 특히 할머니들 너무 좋다. 친근하게 말 붙여주시고 하늘 향해 기도도 해주시고, 어디까지 가냐? 몇 킬로밖에 안 남았다~ 응원도 해주시고 완전 큰 소리로 봉까미노 부엔 까미노 해주신다. 내가 먼저 부에나스~ 하면 엄청 반겨주시고ㅋㅋ

오늘 일정을 이상하게 잡는 바람에 스페인 길을 내도록 혼자 걸었는데 지나쳐 가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별로 지루하지도 않았다. 발 때문에 지친 와중에도 즐거웠다.

숙소 도착이 너무 늦고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슈퍼 가서 대충 맥주랑 컵라면 사다 숙소에서 먹었는데, 거기서 보는 일몰까지 너무 아름다워서 힘들어도 여기 오는 이유가 있구나, 잘 왔다 생각했다.

대서양 일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