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산 꼭대기 알베르게에서의 인연(포르투 해안길 3,4일차) 본문
보통 순례자 숙소로 불리는 알베르게는 까미노 길 옆에 있다. 순례자들을 위한 곳이니 순례자들이 가장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곳에 있는 게 정석이니까.
그런데 가끔 완전히 길에서 동떨어진 산 중턱이나 산 꼭대기에 있는 알베르게들이 있다. 3일차에 묵었던 Viana do Castelo 의 Santa Lucia 성당 알베르게가 딱 그런 곳이다.
보통 3일차에는 다들 거리를 조금씩 늘려서 Vila do conde 부터 26km 정도를 걸어서 비아나 두 카스텔로까지 가는 경우가 많은데(길에서 만난 사람들 전부 목적지가 비아나 두 카스텔로였음. 출발지는 빌라 두 콘데보다 조금 더 가까운 곳도 있었지만) 처음으로 25km 넘게 걸어야 하는데다 산 위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나 경사 엘리베이터가 운행을 안 하는 요즘 시기에(택시 기사 얘기로는 지금 수리 중이고 11월에나 다시 운행한다고 함) 산타루치아 알베르게까지 간다는 건 웬만한 미친놈 아니고서야 잘 감행하지 않는다.
나는 케이블카든 엘리베이터든 하나는 있는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안 하길래 그냥 택시를 탔다ㅠ; 사족인데, 나보다 한시간 후에 도착한 영국 애들(미키, 앤드루, 잭 세 친구들인데 좀 늙어보이는 앤드루 말고는 다들 넘 귀여웠음)은 계단으로 올라왔다더라. 역시 젊은 게 좋은 건가… 나는 그냥 택시 탔다니까 자기들은 그건 옵션에 없다고ㅋㅋㅋ 뭔가 꼭 걸어서 가야 한다는 그런 원칙 같은 게 나름 있나봄. 내일도 Caminha나 A guarda까지 비 맞으면서 갈거란다.
아무튼, 올라가기 전부터 뭔가 그냥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굳이굳이 아픈 다리를 또 끌고ㅠ(아프다면서 왜 맨날 20킬로씩 걷는건데..) 핑고도세(Pingo-doce)에 가서 저녁 거리랑 내일 아침 먹을거랑 팩 와인이랑 주섬주섬 사가지고 산을 올랐다. (여기서 파는 대구살 크로켓 완전 존맛인데 그걸 포르투갈 마지막 날에야 알았음ㅠㅠ 풀풀 날리는 쌀이긴 하지만 밥이랑 약간 깻잎같은 채소 삶아서 무쳐놓은 것도 파는데 완전 내 스타일이다. 내일 비온대서 먹고 죽자 생각하고 와인을 좀 많이 샀는데 정말 잘 한 일임)
근데 거기까지 올라온 용자들이 나랑 영국팀 말고도 또 있었으니, 캐나다 교포 언니들이시다. 50대, 60대인데 산 탈 생각을 하신 분들.(물론 케이블카 없어서 택시 타고 오시긴 했지만) 레지나, 레아 언니들인데 ‘조선말’ 쓰시는 분들이고, 캐나다 생활 이야기, 한국 이야기 하면서 와인 파티를 했다. 초라한 안주지만 산딸기랑 이런 거 놓고 어찌나 재밌게 수다를 떨었는지, 안 그래도 텅 빈 알베르게가 떠나가라 웃고 떠들었다.
힘든 길을 걸어왔고 또 긴 여정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끼리 느끼는 동지애에 같은 말 쓰는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까지 겹쳐서 그런가 뭔가 마음이 더 뜨끈뜨근 해지는 게 있었다. 레아 언니는 심지어 캐나다 가기 전 한국에서 직업도, 대학 전공도, 가족관계도 나랑 공통점이 너무 많아서 정말 신기하더라. 언니들은 시간이 없어서 레돈델라까지 점프를 하신다고 해서 발렌사행 기차를 같이 타고 갔는데, 기차에서 헤어지기 아쉬워서 막 끌어안고 나올 정도로 정을 많이 나눴다.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뭔가가 정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캐나다 언니들 같은 좋은 사람들도 만났고, 길을 걷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했으면 좋겠고, 잘 완주했으면 좋겠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
3,4일차를 요약해보면
3일차: 빌라 두 콘데Vila do conde -> 비아나 두 카스텔로 Viana do castelo 공식 앱 기준 26km 지만 애플워치 기준 30.8km 걸음.
3일차 빌라 두 콘데에서 비아나 두 카스텔로까지는 논 오피셜 해안길이랑 오피셜 마을길이 있는데 다시 간다면 무조건 논 오피셜 해안길로 갈거다. 마을길 걷다 왼쪽 발바닥이랑 발목이랑 다 상해서 계속 고생하고 있음ㅠㅠ 돌바닥 정말 무시무시하다. 왼발이 아치가 많이 낮은, 평발에 가까운 모양인데 돌길 걸었더니 발가락부터 발바닥, 복숭아뼈까지 너무너무 아팠다. 어제 그 길 걷고 난 다음부터 왼발 때문에 계속 아프고 속도도 안 나고 너무 힘들다ㅠㅠ내가 너무 빨리 길을 나서서(6시반에 출발) 몰랐는데 나중에 들으니 순례자들 대부분 해안길을 걸었다고 하더라. 3일차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산길을 타고, 산, 마을을 둘러둘러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산을 내려와서 다리를 건너면 비아나 두 카스텔로에 도착한다.
4일차: 비아나 두 카스텔로-> 국경인 까민하 Caminha 까지 기차로 점프 -> 보트 타고 미뉴 강 건너 스페인 A paxase 로 이동 -> 아 팍사세에서 오이아Oia 까지 도보 이동 -> 오이아에서 아 세라요 A serrallo까지 택시 이동 해서 걸은 건 22.6km (오이아에서 묵으려고 했는데 알베르게가 풀부킹 됐다고 해서 부킹 닷컴에서 다른 숙소를 예약한다는 게 4킬로 더 떨어진 세라요에 있는 곳을 예약해버림ㅠ)
4일차에 원래 걸었어야 할 비아나 두 카스텔로-> 아 과르다는 30km가 넘는 장거리이고, 30km를 걸어 통과했다는 후기가 꽤 보이는데 이건 정말 튼튼하고 하자 없는 다리와 발을 타고난 사람들 얘기고, 조금이라도 걷는 데 지장이 있다면 불가능한 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비아나 두 카스텔로 역에 가보면 배낭 맨 사람들이 꽤 있는데, 나처럼 까민하까지 점프해서 보트 탄 사람도 있고, 내륙길로 가려고 발렌사Balenca 거쳐 뚜이Tui로 향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트를 타고 스페인으로… 차까지 실어 나르던 페리가 문을 닫아서 6인승 보트가 사람들을 실어날라준다. 예약 안 하고 현장 결제 해도 됨. 6유로.
스페인에 들어서면 스페인 같다. 까미노 표지가 달라진다. 곳곳에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석이 서 있고, 노란 화살표도 정말 많고, 예쁘게 장식한 화살표나 조가비 표식도 많다.
보트를 내린 A paxase 에서 노란 화살표를 따라 동산을 하나 넘으면 아 과르다 A guarda 에 도착한다. 여기서부터 대서양을 낀 제주도 풍경이 펼쳐진다. 제주도랑 바다가 정말 비슷하긴한데 오른편 산의 식생이 많이 다르고 지붕이랑 집 꾸며놓은 모습들이 달라서 아.. 그래도 스페인이구나 유럽이구나 하면서 걷는다.
스페인 사람들은 듣던대로 친절하고, 특히 할머니들 너무 좋다. 친근하게 말 붙여주시고 하늘 향해 기도도 해주시고, 어디까지 가냐? 몇 킬로밖에 안 남았다~ 응원도 해주시고 완전 큰 소리로 봉까미노 부엔 까미노 해주신다. 내가 먼저 부에나스~ 하면 엄청 반겨주시고ㅋㅋ
오늘 일정을 이상하게 잡는 바람에 스페인 길을 내도록 혼자 걸었는데 지나쳐 가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별로 지루하지도 않았다. 발 때문에 지친 와중에도 즐거웠다.
숙소 도착이 너무 늦고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슈퍼 가서 대충 맥주랑 컵라면 사다 숙소에서 먹었는데, 거기서 보는 일몰까지 너무 아름다워서 힘들어도 여기 오는 이유가 있구나, 잘 왔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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