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고양이를 부탁해도 돼 본문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20대 여자 아이들의 불안정한 삶을 그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 부둣가에 사는 여자 친구들이 주인공이다. 딱 내 또래에 인천 출신. 1호선을 타고 낑겨서 멀고 먼 서울까지 오가거나, 마땅한 일이 없이 부유하거나. 갓 스무살이 된 여자 아이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한편, 인천 사람들의 애환까지 함께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인천 출신인 나는 인천이라는 공간을 이렇게 느낀다. 뜨내기들의 도시, 기회가 되면 언제든 서울로 떠날 준비가 된 사람들의 도시. 배가 드나드는 동인천 쪽이든 서울과 맞닿은 계양, 부평 쪽이든 인천 사람들의 고향은 인천에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정주 감각을 느끼기 힘든 곳.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가지 않는 곳. 실제로 내 친구들 대부분은 인천을 떠나 산다. 나도 마찬가지.
뚜렷한 목표를 갖고 살다가 불안정한 기다림의 구간으로 굴러 떨어지니 미치겠다. 고양이를 부탁해 속의 지영이는 태희라는 멋진 친구가 있어서 미지의 세계로 떠날 기회를 얻었지만, 난 그런 친구도 없고 뭘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잘 될거라는 확신도 없고, 플랜B도 없다. 그래서 도로 인천에 가고 싶었다. 누구나 잠깐 머물다 가는 장소에 가면 이런 시간도 좀 더 잘 견뎌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인천역에 내려서 신포동을 걷고, 인천항이 내려다 보이는 자유공원에 올랐다가 차이나타운으로 내려왔다. 고양이를 부탁해 영화 촬영 때만 해도 차이나타운은 그냥 화교들이 사는 동네에 중국집 몇 개 있는 곳이었고, 동인천은 인천에서 제일 번화가였다. 잠깐 고딩 때 추억을 풀어보자면, 평일 저녁에도 동인천역에 내리면 인파에 떠밀려 다녀야 했고, 대한서림 앞은 약속 장소라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할까. 화평동 냉면집 가서 교복 치마 단추 풀고 냉면 흡입하고, 제고 앞에서 A4 돈까스 먹고 신포시장 닭강정 반마리에 콜라 서비스 먹고 골목골목 쏘다니곤 했었지...
동인천역 앞 연결 통로에는 여전히 슬레이트 패널이 세워져 있었다. 인천백화점이 문 닫고, 동인천역 리모델링 한다고 그렇게 막아둔 지 거의 20년은 된 것 같은데... 사람으로 넘치던 동인천역 지하상가는 인적이 드물었다. 신포시장 쪽도 마찬가지. 자유공원 오르는 언덕도 적막이 흘렀다. 제물포고 학생들이 무슨 운동을 하는지 함성을 지르는 소리만 간간이 공기를 흔들었다. 사람으로 북적이던 동인천에 대한 기억 때문에 조용한 동네가 더 괴괴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만. 어쩌다 동네가 이렇게 쇠락하고 말았는지, 사람들은 왜 동인천을 떠났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새삼스럽게 비어버린 공간에 서 있자니 위에서 얘기한 인천에 대한 감각이 거리의 풍경으로 나타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공원에서 일몰을 보고 간판은 요란하지만 사람이 드문 조용한 차이나타운 쪽으로 걸어 내려와 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고양이를 부탁해 영화를 틀어 봤다. 스무살로 다시 돌아간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영화를 보고 다시 생각해보니 스무살 때는 참 가난하고 막막했었다. 영화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건사하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고양이를 맘껏 맡아 키울 수 있는 지금, 그 불안하고 어려운 삶을 헤쳐와 여기까지 왔는데 뭐가 걱정이랴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인천에 다녀오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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