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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안 세상

가치의 해체

로얄곰돌이 2024. 12. 17. 17:02

지난 주말, 친구가 어차피 얼굴 보는 김에 여의도에서 보자길래 대에충 4시는 너무 빠듯하고 3시 즈음 보자고 약속한 다음 길을 나섰다.  지하철 타고 가는 길에 일찍 나선 친구한테 연락이 와서 당산역에서 9호선을 못 타겠으니 그냥 걸어가겠단다, 그래? 그러면 나는 여의나루에서 내릴테니 한강공원에서 접선하자고 합의를 했다. 근데 종로3가에서 책 읽다가 헐레벌떡 환승을 했는데, 경로의존성에 따라 나도모르게 1호선으로 갈아타버렸다. 3년동안 그 경로로 학원을 다녔더니 몸이 저절로 움직여버림; 돌아가느냐, 신길역으로 가서 어디 중간 지점을 다시 찾아볼까 고민하다 종각에서 내려서 광화문까지 따릉이로 이동했는데, 아이고야 거긴 또 데시벨 조절을 하지 않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울 시내 노인이란 노인은 다 모여 있는 것 같았고. 잘 걷지도 못하는 분들이 간첩들한테서 나라 구하겠다고 열심히들 오고 계시더라.

아무튼 이미 종로3가를 지나온 5호선은 광화문에서는 꽉꽉 들어 차서 한 대를 보내고 다음 차에 우격다짐으로 몸을 집어 넣고 겨우 탔다. 정거장을 지날수록 없는 틈은 더 좁아져 가고... 외투를 벗어 들고 탔는데도 땀은 쏟아지고... 아무래도 여의나루역에서 내려봐야 올라가는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아서 그냥 마포에서 내려서 마포대교를 건넜다.(내리는데 옆에서 "왜 여기서 내리냐,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데" 이런 말들을 막 하시던데, 함께 지하철에 낑겨 타고 오는 새에 같이 여의도에 가야하는 동지가 됐던 것 같음ㅋㅋㅋ)

국회를 향해 가는 길.

그렇게 어렵게 진입한 여의도에서 좋은 분이 선결제 해주신 공짜 커피도 얻어 마시고, 카페에서 어떤 분이 찜질팩도 가져가라고 굳이 막 떠안겨 주셔서 받고, 탄핵 가결 순간 다같이 환호하고 다만세 신나게 부르고... 그 날 만큼은 사람들이 어떤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떨쳐 일어나고, 연대하기 위해 무언가를 나누고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 참 가슴 뭉클하게 느껴졌다. 매슬로우의 욕구론을 끌고 오자면, 3단계 사회적 욕구나 5단계 자아실현 욕구를 지향하는 200만명의 인간을 한 장소에서 만나는 것 같았달까. 본능에 끌리는 삶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시간과 재산을 베푸는 사람들. 

좋은 날.

그런데 탄핵안 가결 이후 뉴스를 보다 보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를 해체하려는 시도들이 끊임 없이 벌어지고 있다. 계엄은 군대가 개인과 사회 시스템을 장악하고, 자유를 봉쇄하는 것일텐데 실패 했으니 그걸 시도한 게 별 대수로운 게 아니라는 듯한 정치인이나 언론인들의 언설들이 너무 많이 언론을 타고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오늘은 내란 모의를 롯데리아에서 했다는 폭로에 뒤이어 '계엄테마주'라며 롯데지주 주가가 폭등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자본 시장의 합리적 의사 결정이라는 가치를 참여자들이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모습이 황당하기까지 하다. 계엄이 장난 같냐?

배금주의가 팽배하고,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고 천박해지는 것도 모자라 인간들이 이룩해 놓은 시스템이 기능하도록 설정해놓은 여러 가치들이 끌어내려지고 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 개개인의 문제(채용비리, 입시비리, 주가조작, 성폭력 등)에 뻔하게 쳐든 면상들이 한둘인가, 이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수사나 판결은 개인의 윤리적 가치를 무너뜨렸다면, 탄핵 국면에서는 국가의 정체에 대한 훼손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가다간 돈과 힘을 빼곤 세상 모든 게 우스워지고, 세상 모든 게 하찮아질 것 같다. 그런 세상에서 살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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