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추크슈피체 이글루호텔 본문
작년 말에 독일 출장이 잡힌 다음부터 온 신경은 출장 끝나고 나서 어디서 무얼할까에 쏠렸다. 단 이틀동안 어떻게든 재밌게 놀아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강박처럼 뇌리에 박혀서 이것저것 찾아봤다.
일단 이틀밖에 없으니 여러군데 갈 수는 없고, 지난번에 로맨틱가도 드라이브만 하고 못 가본 퓌센 노이슈반스타인 성을 가야겠다 싶었다. 그러면 결론은 알프스다!
알프스 여행기를 찾다가 우연히 독일 최고봉 츄크슈피체에 이글루 호텔이 있다는 걸 알게됐고, 생각해볼 것도 없이 바로 예약을 했다.(그 때 좀 더 생각을 해야 했어...)
첫날 독일 최정상에서 자고 그 다음날 퓌센에 가서 디즈니성을 본 다음 여유롭게 프랑크푸르트 인근 도시(하이델베르크나 만하임을 생각했었는데 결국 다름슈타트에서 잤다)로 가자고 맘 먹었다.
제일 힘들었던 출장지. 안녕 뉘른베르크!
유럽카 예약이 자꾸 취소되고 어쩌고 하는 바람에 결국 시내에서 차를 못 빌리고 뉘른베르크 공항에서 차를 픽업해서 부지런히 알프스 방향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나설 때부터 날씨가 꾸물하더니 공항 주차장에서 나오니까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 알프스 근처에 가니까 비바람이 눈보라로 바뀌어 있었다. ㅠㅠ
좀 걱정은 됐는데 어쨌든 예약도 해놨고 한국인의 기상을 자랑할 수 있는 롱패딩에 패딩부츠도 신었고 어차피 3월초라 추워봐야 얼마나 춥겠냐싶었다. 또 차를 타고 가는 길에 커브를 도니 짠! 하고 나타나는 웅장한 산을 보고 들떠서 역시 사람은 높은 데서 아래를 굽어보며 자야하는 법이지! 이러고 혼자 떠들어대면서 신나게 산 위로 향했다.
정상까지는 동굴을 지나가는 열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 있는데 나는 시간도 없고 굳이 열차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르미슈에 안 들르고 아이브제 호수에 주차를 하고 케이블카를 탔다. 케이블카에서는 아이브제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올라갈수록 점점 눈발이 굵어지고 시야가 흐려지고...추워졌다.
츄크슈피체에 가면 독일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스트리아도 보이고 뭐 어쩌고 그런다고 들었는데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였다. 정상 표식은 보이지도 않고 거기까지 갈 수도 없고 사진을 찍어봐야 그냥 하얗게 나올 뿐.
이글루호텔은 생각했던대로 눈으로 만든 집이었고 얼음 침대 위에 모피 담요를 깔고 그 위에서 침낭에 들어가서 자는건데도 너무너무 추웠다. 옷을 많이 껴입었는데도 너무 추워서 뜨거운 물을 담아 쓰는 찜질팩을 하나 사서 껴안고 잤는데도 추웠다. 밤새 추위에 떨면서 내가 왜 이런짓을, 왜 이런 사서고생을 할까 심각하게 고민해보기도 하고 그냥 호텔에 갔으면 지금쯤 뜨신 물에 목욕하고 맥주나 한잔 하고 있을텐데..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싶다.. 20대에 여기 왔다면 그냥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을까.. 지금이라도 왔으니 앞으로 안 와도 되니 다행이네.. 등등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보고싶고 내 침대에 앉아있는 곰돌이들도 보고 싶었다ㅠㅠ 역시 우리집 안방이 세상에서 최고!
누군가 이글루호텔은 어땠냐고 묻는다면 그냥 추웠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다. 영하 약 2~5도 정도 추위에서 금방 난방이 가동될거라는 기대감이 없이 견디는 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얘기해주고 싶다. 뭐 몸에 열이 많아서 추운 걸 즐기는 사람이라면 정말 최적의 장소이자 좋은 경험이 될테고.
눈보라 치는 날이 아니었으면 좀 더 좋은 추억으로만 남았을 수도 있다. 눈이 와도 야외 자쿠지는 운영하는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바라보는 경험도 할 수 있을거고(눈보라만 안 친다면!!!! 구름만 안 낀다면!!!), 맛있는 퐁듀와 팬케잌 수프? 같은 평소에 잘 못 먹는 음식도 먹을 수 있다. 호불호가 있다던데 나는 둘다 넘 맛있어서 수프는 리필해서 먹고 퐁듀도 엄청 먹었다. 따끈하게 데운 화이트 와인이랑 환상조합이다. 천혜의 자연설에서 신나게 눈썰매 탄 건 정말 재밌었다. 또 타고 또 타고 지칠 때까지 탔다. 다음날 아침에 케이블카 타고 올라온 스키어들을 보니까 정말 부러웠다. 이런 눈에서 스키를 탈 수 있다니. 다음에 겨울 알프스에 오면 꼭 잠은 밑에서 자고 스키를 타러 가야겠다 맘먹었다.
+이글루호텔에 관한 정보
-알프스 이글루호텔은 오스트리아인이 처음 만들었다. 스키를 너무 사랑하던 그는 스키를 타기위해 산 정상에서 비박을(내 기준 미친놈) 하다가 좀 발전해서 1인용 이글루를 파서 겨울을 났다고 한다. 그걸 기발하다고 생각한 그는 스키를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규합해서 좀 더 큰 이글루 호텔을 짓기 시작했고, 펀딩을 받아 알프스 여기저기 호텔을 만들게 됐다. 지금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프랑스 여기저기에 있다. 호텔마다 시즌마다 컨셉이 다르다. 내가 간 곳은 올해는 바다컨셉이었다.
-이글루호텔은 겨울에만 운영한다. 스텝들은 다른 직업이 있고 겨울에만 일한다.
-이글루를 지을 때는 풍선에 바람을 넣어서 모양을 만들고 이후에 벽을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전기 배선 작업은 거의 막바지에 하고 다 지어지면 조각을 하고, 정교한 얼음 조각은 외부에서 만들어서 가져온다.
-호텔은 눈이 쌓이면서 천장이 점점 내려앉는데, 각 방 문 옆에 천장높이를 측량할 수 있는 간이 측량기로 파악할 수 있다. 측량기가 맨 밑까지 밀려 내려오면 천장을 갈아내 다시 높이를 맞춘다.
-예약을 하면 호텔에서 미리 바우처랑 가이드북을 pdf로 보내주는데 거기 써있는대로 월동+등산 준비를 해가야 후회 안한다.난 그것까진 다 준비했는데 가져가려고 맘먹었던 핫팩을 빼먹고 갔음ㅠㅠ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무조건 핫팩! 핫팩! 핫팩이 있어야 한다.
-실내 사우나와 야외 자쿠지 중에 고르라고 하면 무조건 야외 자쿠지다. 눈보라가 불어도 야외 자쿠지가 좋았다. 머리는 차갑고 몸은 따뜻하고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만약 별이 빛나는 밤이라면 더 말할나위가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