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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지 않아도 충분했을 헤르본 (Herbon) 수도원 숙박기(포르투 해안길 10일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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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지 않아도 충분했을 헤르본 (Herbon) 수도원 숙박기(포르투 해안길 10일차)

로얄곰돌이 2022. 10. 18. 17:42

여기 와서 확실히 느끼는 건, 나는 아침형 체질이라는 것이다. 술 좋아하는 아침형 인간이라는 게 좀 안 맞는 것 같긴 한데 아무 제약 없이 잘 시간, 기상 시간을 골라보니 술 후딱 마시고 자서 새벽같이 일어나 활동하는 게 훨씬 편하다. 새벽 공기와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어제 점심부터 맥주, 와인으로 신나게 달리고 10시 전에 잤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든 것 같은데 목 말라서 눈 떠보니 12시. 물 마시고 화장실 다녀와서 좀 뒤척대다가 다시 잠들었는데 다시 눈 뜨니까 5시 40분… 딱 느끼기에도 꿀잠을 푹 잔 느낌이다. 중간에 화장실 가느라 잠귀 옅은 사람한텐 좀 미안하긴 하지만 어쩌겠냐.(이렇게 적어놓고 같은 날 밤 코골이를 만나서 4시간도 못 잠ㅠ)

요즘 해가 너무 늦게 떠서 8시 넘어야 겨우 미명을 볼 수 있고 일출 시간은 8시 40분이다. 그래서 오늘처럼 7시 즈음 길을 나서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걸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마을을 좀 지나자 마자 가로등이 없어지고 캄캄한 오솔길이 나오길래 사람들 좀 기다려볼까 하다가 용감하게 핸드폰 불빛 최대치로 키우고 걸어봤다. 근데 또 걸으니까 걸을 만 하더라. 가다보니 나보다 조금 더 일찍 나온 듯한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좀 따라 가보다가 얘네는 뭐 도마뱀 보고도 난리 피우고 이래서 앞질러서 그냥 쭉 걸었다. 이제는 그냥 어둠 속에서 걷는 데 도가 텄다고 할까;;

밤길을 부지런히 걸었더니 8~9km 정도 왔는데도 겨우 9시가 넘었더라. 때마침 바를 하나 발견해서 카페 콘 레체를 마시고 있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기라 걱정했는데 그래도 여정 막바지에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실내에 있을 때 비가 오니까 그래도 채비하기는 편했다. 판초 꺼내고, 간이 스패츠(바지에서 타고 내려오는 물을 막아주는 얇은 커버를 한국서 갖고 왔는데 완전 좋음!) 끼고, 배낭에 레인 커버도 씌우고, 준비를 싹 마치고 빗길로 나섰다. 아, 카페에서 어제부터 종종 마주치던 아저씨들이 선물 줘서 그것들도 가방에 매달고.

분명히 예보에는 오후 1시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왜 벌써 오는 건지? 어쨌든 많은 게 다행이었는데 그래도 날씨가 덥지 않아서 판초 입고 걸을만 하다는 거였다. 날도 더운데 판초 덮었으면 진짜 짜증 백만배 늘었을 듯…

7시가 무슨 새벽이냐 싶은데 암튼 동이 안 터서 새벽길…

칼다스 데 레이스에서 파드론 방향으로 가는 길에 순례자 휴게소가 있다. 비가 쏟아지니까 아무도 안 들어오고 다들 길 재촉하기 바쁘더라

오늘은 길도 편해서 별로 쉬지도 않았는데, 좀 덜 쉰 이유가 헤르본 수도원에 선착순으로 도착하기 위해서다. 파드론에서 가까운 수도원이고, 알베르게에서 자면서 미사도 볼 수 있고, 성당 투어도 하고 같이 저녁도 먹고 그런다고 해서 한번 와봤다. 오늘은 또 일요일이잖아? 지난주에 일요일인 줄 모르고 본의 아니게 성당을 빠지게 돼서 오늘은 굳이라도 수도원을 와야 했음!

근데 갈림길에서 표지판을 보니까 알베르게는 4시부터 연다고 하고, 내가 그 표지판을 본 게 12시 전이고, 한 시간을 걸어도 3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그냥 파드론 쪽으로 좀 더 걸어가서 점심 푸짐하게 시켜서 먹고 갔다. 점심 먹고 갈림길로 길을 되짚어 갔는데 1시 정도 되니까 칼다스 데 레이스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쏟아져 오고 있었다.

헤브론 수도원 가는 길은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였고, 마침 날도 개서 혼자 휘파람 불면서 총총 걸었다. 길도 편하고, 아름답고, 강에 떠 있는 오리 커플도 귀엽고 기분 좋게 도착! 가보니까 내가 4등이더라. 엄청 빨리 갈 필요가 없는;;; 그리고 지금 비수기에 들아와서 총 인원이 15명 정도밖에 안 된다. 뭘 위해 그렇게 애닳아서 걸음을 재촉했냐? 맨 나중에 도착한 마리아스를 포함해도 결국 20명도 안 왔다.

에르본 수도원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 4시부터 문을 연다는 게 좀 아쉬웠다.

알베르게 오픈 시간도 멀었겠다, 파드론 쪽으로 강 건너 점심 먹으러 간다.

다시 돌아와서 에르본 방향으로 향했다. 에르본수도원은 빨간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룰루랄라 수도원 가는 길 점심 먹고 날도 개서 기분이 참 좋았다.
수도원 가는 길에 있는 우야Ulla강. 가는 길이 아름다워서 더더욱 가보는 걸 추천.
아까 표지판에서 2.7km를 더 걸어야 한다. 수도원 도착! 2시쯤 도착했는데 내가 4번째다. 왼쪽 체코 커플은 둘다 예술가인데 둘 다 조용조용한데 엄청 유머러스하다. 보고 있으면 이래서 둘이 커플이구나 딱 느껴진다. 남자가 사진작가라 여기저기 같이 여행 다니고 있다고.

암튼 3시쯤 되니까 신부님이 나오셔서 성당에서 키우는 사과 나무에서 바로 사과를 따서 주셔서 잘 먹고 4시부터 체크인 하고 씻고 오늘은 세탁을 못 하니까 6시 미사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메모장 키고 글이나 톡톡 쓰고 있다.(티스토리 대체 언제 복구 되는 거여ㅠ)

세요도 이쁜 에르본 수도원. 수도원에서 사과를 키우기 땜에 사과나무가 그려져 있다. 졸귀ㅋㅋㅋ

미사 시간에 문득 눈을 들었는데 예수님이 브이 하고 있음. 저기 한국인이세요?

한국 사람들이 기부 많이 한 덕인지 삼성 티비가 비치됨.

미사 끝나고 신부님이 순례자들만 나오라고 해서 각 나라 말로 기도문을 낭송하게 하신다. 이거 읽다가 갑자기 막 울컥 해서 울먹거렸다ㅠ 참 별 게 다 눈물이 나네ㅠㅠ

미사 후에는 원래 수도원 구경을 하게 돼 있는데 또 비가 쏟아져서 그냥 쉬다가 같이 저녁 먹었다. 봉사자님이 내일 아침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조용하고 조촐하게 먹고 끝냈다. 다음날 아침도 같이 이렇게 모여서 밥 먹는다.

이번 까미노길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경유지가 에르본 수도원이다. 같이 미사 보고, 기도문 읽고 모여서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것들이 다 좋았다. 다음날 산티아고에 들어가는데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하는 것도 괜찮은 듯.

10일차 요약> 칼다스 데 레이스 Caldas de leis -> 에르본 수도원 Convento de Herbon. 닌자앱 기준 16.4km + 수도원 가는 길 2.7km (19.1km) 애플워치 기준 23.7km

길이 아주 평탄하고 포도밭길, 아스팔트길, 산길 골고루 걸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비를 만나서 판초를 쓰고 다녔다. 날씨도 확 추워졌는데 판초 쓰고 다니니까 오히려 추운 게 나았음.

자기 전에 다음날 오 도이미로에 예약해놓은 알베르게를 취소하고 산티아고 알베르게 예약을 하루 당겼다. 웬지 그냥 걸어도 될 것 같아서? 도 그렇고 더 이상 빨래 하고 싶지 않아서ㅠ 가서 옷 쇼핑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