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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 의미가 없으면 어떠리(포르투 해안길 8일차)

로얄곰돌이 2022. 10. 15. 03:12

앞으로 3일 또는 4일, 내일부터는 계속 비가 온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을까 고민 중이다. 지금까지 비온다고 한 날 제대로 비 온 적이 하루도 없어서 믿기는 힘들지만 암튼.

그냥 지금 페이스대로 가버릴까(12시 순례자 미사는 그 다음날 참석)? 중간에 하루 더 쉬고 마지막날 쉬엄쉬엄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해서 그 기쁨을 만끽하고 바로 미사를 볼까? 마지막날 새벽부터 달려서 12시 전에 도착해볼까?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일단 몸이 지금처럼 멀쩡하다는 전제에서 3일만에 도착하는 걸로 마음이 기울고 있다. 좀 열심히 걷는다고 다리가 3일만에 부서지지는 않겠지.

오늘은 깔끔하다고 추천 받은 알베르게를 취소하고 낡은 호텔방을 잡았다. 어제 출발지부터 다니엘 할아버지 만나서 같이 걷느라 묵주기도도 하루 건너 뛰었고, 숙소에서도 밤 늦게까지 독일에서 온 두 마리아 친구들이랑 조촐한 와인 파티를 했더니 뭔가 지친 느낌…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고 재미도 있었는데, 그래도 한국에서도 늘상 혼자 다니는 사람이 스페인에 온다고 갑자기 사람들 없으면 못 살고 그렇게 바뀌지는 않는거잖아?(혼자 잘 노는데 신기하게도 MBTI 검사하는 족족 ENFP가 나옵니다… 못 믿을 테스트…) 그러니까 사람들이 싫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항상 그득한 사람들 사이에서 놀고 싶지도 않다는 거지. 근데 이 길을 혼자 걷는 이상 또 만나는 사람들이랑 소통을 안 할 수는 없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안전상, 정보상, 예의상 그래야만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랄까.

그래서 나한테는 아직까지는 이 길이 한국에 있는 좋은 인연들에 대한 소중함, 그리움 같은 것들을 좀 더 배가 시켜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어제 만난 사람, 엊그제 만난 사람 또 마주치면 반갑지. 그런데 그럴수록 10년 넘게 만난 내 친구들 내 가족들이 더 보고 싶어 진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끊임없이 새로운 ‘뭔가’를 꿈꿔왔던 것 같은데, 여기 와서 보니 이제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이 그렇게 고프지는 않은 것 같다.

또 유럽 풍경, 성당, 석조건물, 다양한 양식들 이미 너무 많이 경험했고 건축이나 조형물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 사진도 잘 안 찍게 된다. 그동안 돌아다니면서 찍었던 숱한 사진들 다시 열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기도 하고, 종교 미술, 건축이라고 해봐야 뭐. 전공자나 업계 사람 아니고서야 그게 그것 같고…

며칠 걷다 보니 길에서 뭔가 의미를 얻었니? 라는 질문도 식상하고;; 그냥 이 루트는 이렇게 정해놨으니까 걷는거지 뭔 의미? 몰라 나는 그런거. 시간 많은 사람들이 뭐라도 있나 싶어서 와보는 거 아닌가.. 나는 여행은 가고 싶은데 혼자 몇 주는 외로울 것 같아서 와 봤다.

그래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카톨릭이라 함 와보고 싶었다.”라면서 엄청 독실한 신자인양 답하고 있는데 이상적인 답변을 못 찾겠다. 방학이나 휴가 기간이 끝나서 만나는 순례자들의 절대 다수가 50대 이상이라는 점도 한 몫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어제 바르셀로나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친구랑 회사 얘기 한거랑 오늘 아침에 만난 폴라치 이코노미스트 커플이랑 한국 기업이나 여러 경제 데이터에 관해서 얘기 나눈 건 재밌었다. 이런 얘기가 그들의 삶의 의미를 더 느끼게 하고 나도 흥미가 있달까. 아직은 인생을 반추하거나 혼자 길을 걸으며 내 안에서 뭔가 의미를 찾기보다는 일, 일을 통한 밥벌이, 내가 만족할만한 직업에 매진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8일차> Cesantes -> 폰테베드라 Pontevedra
닌자앱 기준 18.7km, 애플워치 기준 동네 구경한 거 합해서 25.6km.

오늘도 눈을 뜨니 새벽 5시. 해가 늦게 뜰 걸 아니까 침대에서 한 시간이나 뒹굴다가 6시에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어제 알베르게에 여유가 있어서 팀별로 방 하나씩을 썼는데 덕분에 나 혼자 방 하나를 통째로 다 썼다. 아침 기상 방귀 나팔 뿜빠라밤 신나게 불고 시작!!

조식을 새벽에도 먹을 수 있게 준비해놓는 곳이라 아침도 먹고 7시 즈음 출발했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오늘도 동 트기 전에 길을 걷기 시작!

작은 동네지만 골목 골목 가로등이 있어서 신나게 걸어갔다. 한 20분 걸었나?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나온 노점상을 만나서 뱃지를 하나 샀다. 열심히 사는구나!!

그리고 계속 룰루랄라 걷기 시작했는데 읭?? 엥?? 가로등이 없네? 앞은 칠흑같은 어둠이고, 길은 하나도 안 보이고, 핸드폰을 꺼내서 렌턴을 켜고 걷는데 길이 마을을 벗어나서 나무 숲이 나오니까 한치 앞에 안 보인다. 핸드폰 불빛으로는 바로 내가 딛을 바닥도 잘 안 보이더라ㅠㅠ 그래서 노점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사람들을 좀 기다려야겠다고 돌아섰는데 노점 앞에 누군가 사람들이 보인다!

폴란드인 커플이다. 나랑 같이 좀 가자~ 그러니까 흔쾌히 같이 가잔다. 그동안 아무리 새벽에 나와도 헤드랜턴이 필요 없었는데 사람들이 헤드랜턴 챙겨가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 알았다. 이런 숲길이 문제로구만. 그 사람들 덕분에 오늘 길 초입부터 있던 산길, 숲길을 안전하게 잘 통과했다. 콤파스가 길지만 나를 위해 속도를 늦춰 걸어준 고마운 커플… 이코노미스트라 한국 기업 잘 알… 궁금한 건 한국 관련 데이터! 관심사가 비슷한 게 참 좋구나!

동이 트고나서 마을길이 나오길래 너희들은 먼저 가라 난 천천히 갈게 하고 비상식량 하나씩 사서 안겨주고 헤어졌는데 혹 떨구고 나니까 진짜 날아가더라. 시간이 없긴한데 산티아고 지나서 피스테라, 묵시아까지도 갈 계획이라고 하던데 그 속도면 뭐…

고마운 폴라치 커플. 잘 가라 인사하고 돌아서니까 저만치 가 있음;; 이 커플 졸졸 따라가느라 오늘은 시작부터 부스터 달았다.


이 커플이 속도를 한참 늦춰서 걸어줬는데도 나는 최고 속도로 걸었다. 거기다 10km 언저리까지는 산길이라 앉아서 쉴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또 쭉쭉 걸었다. 아침에 보슬비가 오고 안개가 껴서 바위들도 모두 젖어 있어 앉을만한 곳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런 이유들 덕분에 도착은 엄청 빨랐다.

사진 다시 보니까 앉을 곳이 완전히 없었던 건 아니고 이런 벤치 물기 닦고 앉았으면 되는데 사진 찍느라고 앉아 쉴 생각을 못 함;;

유명한!!! 삼파이오 Sampaio 다리. 포르투 길을 따라 산티아고로 갈 때 무조건 건너는 다리다.

아침부터 너무 내달린 탓에 여전히 인적이 드물어 사진 찍어달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셀카 찍지 뭐.

다리 지나고 마을길 잠깐 통과하면 계속 산길, 포토밭길을 걷는다.

원래 비 예보가 있었는데 아침 되니까 예보가 바뀌고 안개만 좀 꼈다. 산할아버지만 구름 모자 썼다.

얼마나 기다렸던 카페인지!!! Arcade에 카페가 많이 있으니 모닝 커피는 거기서 마시고 넘어 와야 한다.

카페 콘 레체에는 쿠키가, 오렌지 주스(zumo de naranja)에는 샌드위치 조각이 딸려 나온다. 양으로 보면 한 끼 먹는건데 다 해서 2.9유로밖에 안 함.


오늘은 거리도 그리 멀지 않고 빨리 걸은 덕에 점심시간 전에 폰테베드라에 도착했다. 숙소까지 한 10분 남겨 놓고 걸어가다가 ‘Vino o cerveza con necora’라면서 꽃게 그림이 그려진 바를 우연히 발견했다.(사진 찍을걸..) 네코라가 뭔지 검색해보니 ‘벨벳게’ 라고 하고, 궁금해서 점심으로 시켜봤는데 에피타이저 수프, 빵이랑 또르띠아, 벨벳게랑 술이 세트메뉴로 나왔다. 소프트 크랩 종류인 것 같은데 껍데기가 부드러운 곳은 씹어 먹고 살 많은 덴 발라먹고 넘 잘 먹었다.

이것이 벨벳게. 껍데기가 얇은 편이라 다 씹어먹어도 됨. 이 구성에 수프까지 다 해서 5.8유로. 알바생인지 주인 딸인지 모르겠는데 서버가 넘 일을 잘 해서 더 맘에 들었음.


폰테베드라도 꽤 규모가 있는 도시고 곳곳에 성당이랑 수도원이 있다. 도시에 오니 중국 관광객도 보이고 활기가 넘쳐서 좋다.

폰테베드라를 지키는 강아지랑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 도시 한가운데 수도원이 있다.

순례자를 위한 Igrexa da Virxe Peregrina 성당.

폰테베드라 초입에 있는 기차역. 무한동력 두 발로 걷고 있지만, 기차역을 보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