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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동력

가을이로구나(포르투 해안길 9일차)

로얄곰돌이 2022. 10. 18. 17:32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도 가을이다. 지난주까지는 낮에는 그래도 해가 좀 따가울 정도로 더웠는데 주말로 넘어오면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것 같다. 낮에도 그렇게 덥지 않고 저녁엔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는 추워지기 시작했다. 맨다리로는 못 다니겠어서 점점 챙겨온 원피스가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중.

오늘도 아침 일찍 출발. 왜 이렇게 해가 늦게 뜨는건지

대도시에서 나갈 때는 이른 아침부터 순례자들이 꽤 많다. 오른 쪽에 있는 할아버지가 어두운 길을 앞뒤로 살펴줌. 나중에 와인도 한 잔 사주고. 고마운 분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수확철이라 볼거리가 참 많다. 걸으면서 제일 흔하게 볼 수 있는 건 포도밭. 이미 가을걷이가 얼추 끝나서 포도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갈변이 시작된 연두색 이파리들이 형형색색 예쁘다. 때때로 아직 따지 않은 포도도 볼 수 있는데, 그 밭 옆을 지날 때면 포도향이 확 코 끝을 스치면서 와인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이렇게 눈으로 향기로 유혹하는데 이거 원 안 마실 수가 없잖아..(그래서 오늘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와인 3분의 1병을 또 마셔버렸다. 타파스집에서 와인 한잔 달랬더니 저 정도 남은 걸 병째 가져옴;;)

이 동네에는 그렇게 대농은 없는 것 같고, 각자 집 마당에서 이것저것 많이 키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파, 케일, 옥수수, 호박, 수세미 같은 것들은 우리나라 흔한 전원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케일은 밑둥을 다 뜯어 먹어서 앙상한 줄기 위에 큰 잎들이 매달려 있는데 일부러 멋내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나름 멋있다. 봄, 여름 내내 부지런히 뜯어 먹었을 생각을 하면 좀 귀엽기도 하고. 옥수수도 이미 한 차례 수확은 끝난 것 같고 이제 잎이 누렇게 변해가고 호박은 아직 꽃도 피지만 이미 자라서 엄청나게 큰 호박 덩이도 종종 보인다.

산길로 올라가면 위풍 당당하고 멋있게 서 있는 나무는 유칼립투스이긴 한데, 가장 흔하게 보이고 아기자기한 즐거움을 주는 건 역시 밤나무다. 걷는 내내 밤송이가 주변에 굴러다닌다. 지나가다 아침부터 나와서 밥 줍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포르투랑 폰테베드라에서는 군밤장수도 봤는데 산티아고나 어디 다른 도시에서 또 만나면 사먹어봐야지.

아직 수확 안 한 포도들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거 진짜 귀여움. 포도 따기 전에 왔으면 포도향도 엄청 맡았을 듯.
밤송이. 이번 여행을 내내 함께해준 밤송이.
2.3유로인가 와인 한잔 시키면 저렇게 3분의 1병을 내오는 집도 있다. 맛조개는 여기서도 비싼 편.. 그래도 전부 다 해서 11유로 정도.

사족1. 이 동네 사람들은 밤을 ‘마로네(marrone)’라고 하고, 캐나다 사람은 ‘체스트넛(chestnut)’이라고 하더라. 나는 한국말로는 ‘밤’이라고 넘 귀엽다고 막 혼자 좋아함ㅋㅋㅋ

감자는 여기서는 파타타(patata)라고 하고 독일은 뭐라더라? 카토페? 검색해보니 카토펠(katofell)이라고 하네. 참나. 감자가 거의 주식이면서 왜 그렇게 못나게 부르는거지? 또 내가 한국말로는 ‘감자’라고 너무 귀엽지 않냐고 그랬더니 감자는 귀엽다고 인정하더라.

사족2. 여기서 만난 유럽인들이 신기한 게 내가 어려보이는 게 피부 때문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 피부는 다 우리나라에 좋은 화장품이 많고 시술이 발달해서라고 믿고 있는 듯?? 기미나 잡티 같은 거 없애주는 크림을 쓰느냐? 등 오해를? 많이 하는 느낌.

조상님 잘 만난 덕이지 뭐. 니들이 제국주의 승리자 조상님 가진 덕보다야 좋겠냐. 물 좋고 햇볕 부드러운 편이고 4계절 있어서 겨울에 회복되고 물성 자체가 좋고 등등 타고 난거다 이 말씀. 그래도 한국 화장품과 시술이 좋아 보인다면 메이드인 코리아 화장품 많이 사 써라~


9일차 요약> 폰테베드라 -> 칼데스 데 레이스. 닌자앱 기준 21.5km, 애플 워치 기준 25.6km(동네 산책 다녀온 것 포함)

오늘도 아침 일찍(7시 20분쯤) 출발했다. 도시는 헤드랜턴 없이도 걸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중간에 숲길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오솔길이 하나 나왔는데 오늘은 앞뒤로 사람들도 좀 있고(길이 멀고 비온다고 해서 빨리들 출발한 듯) 완전 바이킹 같이 생긴 키다리 아저씨가 내 앞뒤에서 길을 봐주면서 걸어줘서 안전했다.

중간중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긴 했는데 바닥이 좋아서(돌길만 아니면 어떤 길이든 OK) 걷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아침엔 안개만 좀 꼈다가 중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촐촐 까지도 아니고 부슬비라고 하기도 약한 비가 와서 배낭 커버만 씌우고 걷다가 빗줄기가 좀 더 많아지는 느낌(희한하게 빗줄기가 굵어진다기보다는 밀도가 높아지는 것 같더라)이 들어서 드디어 처음으로 판초를 꺼내 입었다.

입고 걸은지 한 10분만에 부슬비도 거의 그쳐서 그냥 땀복 입고 걸은 셈이 되긴 했지만 판초 입고 걷는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해야지 뭐. 근데 판초 괜히 입었네! 라는 짜증보다는 비 그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 좀 걷다가 판초 벗고 끝까지 편하게 왔다. 좀 전에 산책 나갈 때도 비가 부슬부슬 왔는데 너무 오래 밖에 있는 것만 아니면 바람막이 모자 쓰고 다닐만 하다 싶었다. 끝날 때까지 제발 큰 비만 오지 마라ㅠ

처음 판초 꺼낸 날. 이후로 매일 꺼냄ㅠ

민들레 홀씨 불면서 걷는 길.

칼데스 데 레이스 초입. 우미아Umia강. 강 옆으로 공원이 넓게 조성돼 있는데 멋있다. 이 동네에는 온천이 있다.

저리로 가. 넵!

온천물이 솟아나는 샘. 여기 발 좀 담궜더니 피로가 풀리는 느낌.


오늘은 세요가 예쁘기로 유명한 알베르게로 왔는데 그래서인지 여성 도미토리만 거의 꽉 찼다. 그게 뭐라고 도장 하나 받겠다고…

그래서 덕분에 캐나다에서 오신 언니들 만난 이후로 처음 아시안을 마주쳤다. 대만에서 온 친구들인데 내가 드디어 아시안 만났다고 엄청 반가워했더니 자기들도 좋아한다ㅋㅋㅋ

거리가 짧아서 부지런히 걸어서 점심 먹기 전에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타파스 바에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여기서 어제 새벽에 나 불빛 비춰주면서 같이 걸었던 폴란드인들을 우연히 또 만났다!

오늘 더 멀리 가야하는데 여성분이 좀 아파서 한참 쉬었다 가는 거라고;; 그 사람들이 너무 반가워해줘서(막 뛰어나오더라) 나도 넘 기분 좋고 가게 주인들도 덩달아 기뻐하고ㅋㅋㅋ 그 가게 주인들 넘 좋은 게 아프다니까 이것저것 챙겨주고 있었다. 거기서 점심으로 먹은 맛조개(Navaja)가 그리 맛있었다.

세요가 예쁜 알베르게. 시설은 so, so. 다인실 쓰는 날 뒤척거리지 않으려면 술을 왕창 마셔야…


날도 축축한데 또 와인 한잔으로 목 축이러 가야겠다….

라고 써놓고 문 열어놓은 가게 찾아 가다가 아까 새벽에 만난 바이킹의 후예 아저씨가 혼자 앉아서 와인 마시고 있는 걸 보고 인사 했다가 또 한참 수다를… 바이킹은 모르겠고 네덜란드인이란다. 아이트호벤 사는데 NXP 2인자가 자기 친구였다나..(여기 와서 나누는 얘기들 중에 그나마 일 얘기가 제일 재밌다ㅠ)

여기 와서 느낀건데 같은 유럽 사람이라도 네덜란드인들이 독일인보다 영어를 훨씬 알아듣기 쉬운 말로 잘 하고, 젊은 애들일수록 어느 나라 출신이든 상관 없이 미국식 발음이 많이 녹아 있어서 알아듣기 쉽다. 방학이 끝나서 젊은 애들을 잘 못 보긴 했지만 암튼.

서양인 중에 이렇게 젊어보이는 사람 첨 봤는데 70세란다. 우리 아빠랑 비슷한데 무릎 튼튼한 거 넘 부럽ㅠㅠ 안그래도 나보고 자기 딸 나이쯤으로 생각했다더라. 15년 전, 그러니까 50대에는 자기 집(네덜란드)에서부터 텐트 매고 산티아고까지 갔다왔다고 자랑하는데 50대에도 그런 걸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다는 게 좀 부러웠다. 짧은 시간동안 참 여러 주제로 다양한 얘기를 하는 것도 제주인 것 같다. 연륜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산티아고 까미노를 또 온다면 프랑스길은 생장 가지 말고 꼭 르퓌길로 가라는 추천도 받았다. 너무 아름다운 길이라고… 나는 까미노를 또 올 생각은 없긴한데 담에 여행은 함 가봐야지.

같이 저녁도 먹자고 했는데 프랜치, 저먼 구성이라고 해서 나는 그냥 혼자 먹겠다고 하고 줄행랑을 쳤다.ㅠ 가면 갈수록 왜이리 피곤한지;;

내일은 나는 파드론(Padron)으로 안 가고 에르본(Herbon) 수도원으로 갈 예정인데, 그 다음날 오 도미야도이로(O domilladoiro)에서는 조인하겠다고 하니까 왜 나눠서 가냐고 한 번에 걸어서 산티아고 12시 미사 참석 하라고 난리;; 헤르본에서는 30km 가야 하는데요;; 혹시 도전하게 된다면 그 날 뵙겠습니다. 어르신!

숙소에 돌아와서 대만 친구들을 다시 마주쳤다. 와인 한 병으로 덕분에 다같이 즐겁게 마셨다. 대만 친구 한 명이 우쿨렐레 연주도 할 줄 알아서 노래도 불러주고 참 아름다운 밤이네요.

친구 셋이 왔다는데 넘 부럽부럽.

덧,
오늘 카톡이 갑자기 안 되고 오기로 한 연락이 안 와서 카톡 업데이트도 해보고 엄한 유럽 통신사 욕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서 카톡 데이터센터에 불이 났다고;; 뭔 국민 메신저가 데이터센터 하나 불 났다고 운영이 중단 돼? 백업은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거 아냐? 티스토리도 당연히 먹통이 됐고, 복구 우선순위에서도 한참 밀려있을 것 같아서 메모장에 일단 쓴다.
(나중에 옮겨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