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감상 노트 (63)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지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던가? 동시에, 나는 계속 여행을 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는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국내 여행을 가기 전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해당 부분을 읽어보고 가곤 하는데 확실히 책을 읽었을 때와 안 읽었을 때 여행에..
어떤 때는 홀린 듯이 무슨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 아니었나 싶다. 오전부터 내리쬐는 햇빛이 너무 따가워서 그랬다. 뭐 햇살이 강해서 살인도 하는 판에... (뜻을 대충 추측해보면 영어로 'The greatest hits'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황작가가 데려간 서울 레코드페어에서 산 중고 LP인데, 68~76년 사이 브라질 히트곡 컴필레이션 앨범 중 하나라고 판매자가 직접 손글씨로 앨범 겉 포장에 라벨지를 붙여 설명을 적어놨다. 이 앨범 뿐만 아니라 모든 앨범에 그렇게 꼼꼼하게 기록을 한 걸 보면 참 친절한 음악 애호가 레코드점 주인인 것 같다. 거기다 이 음반을 집어들자마자 다섯번째 음악이 정말 달콤하고 좋다고까지 덧붙이기까지 하는데 안 살 수는 없는 노..
"인류 문명사는 변방이 다음 시대의 중심이 되어 온 역사이다. 오리엔트 문명은 변방인 지중해의 그리스·로마로 그 중심을 옮겨 간다. 그리고 다시 갈리아 북부의 오지에서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문화가 꽃핀다. 그리고 근대사의 중심부는 해변의 네덜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옮겨 가고, 다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변방으로 변방으로 그 중심을 이동해 온 것이 인류의 문명사였다.동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중국은 황하 유역을 중심부로 삼아 공간적 이동이 없다고 반론하지만 중국역사 역시 고대의 주(周), 진(秦)에서부터 금(金), 원(元), 청(淸)에 이르기까지 변방이 차례로 중심부를 장악한 역사였다. 그러한 변방의 역동성이 주입되지 않았더라면 중국 문명은 결코 지속 가능하지 ..
꼭 밤 1~2시까지 술을 진탕 마시다 보면 김 선배는 내 어깨에 팔을 걸고 그랬다. "로얄아 언니네 가서 한 잔 더 하자." 고주망태 둘이 들이닥친 집에서 형부는 부지런하게 맥주캔을 꺼내 왔고 우리는 또 날새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면서 냉장고를 털곤 했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에 선배 집을 나와 큰 길에서 그 건물을 처음 봤을 때는 내가 술이 취해서 뭔가 세상이 휘어 보이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더랬다. 바로 이 건물. 눈을 껌벅거리면서 보다가 택시를 탔던 기억이... 이후로 그 동네에 갈 때마다 복도라도 한번 올라가보자고 맘 먹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는 주변에 갈 일이 많으니 한 번은 갈 일이 있을 줄 알았다. 기회가 되면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래집 지붕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궁금하고. 겨..
"어느 젊은 여자가 즐거운 기분으로 쾌활하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살인자가 된다. 사실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신문 보도 때문이었다." -작가는 카타리나블룸에 대한 사건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책을 읽기 얼마 전에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제는 특종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기자라고 해봐야 SNS보다는 한참 늦을 뿐. -불분명한 사실들에 대한 보고가 넘쳐나면서 정말로 뭐가 옳은 건지 옳지 않은 건지 알 수 없게 된 상황. 상대는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언론사와 기자가 더 필요한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그에 대한 내 생각은 그걸 추구하는 기자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게 물타기가 난무하는 세상이 됐고, 사실 기자들..
화물트럭 운전수가 돼 대륙횡단을 해봐야겠다고 처음 생각한 게 교코를 읽고서다. 아마 대학 때인걸로 기억 나는데 이 소설을 읽고는 뉴욕, 미국, 트럭운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었던 것 같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나보다. 유로트럭이라는 게임까지 출시된 걸 보면. 물론 그거 하던 사람들이 부모님들한테 등짝을 숱하게 맞았다는 걸 보면 그리 뽀대나는 직업이 아닌것만은 분명하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트럭 운전수를 꿈꾼다. 라디오를 벗삼아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길을 달린다. 언제나 목적지는 있으니 불안할 것도 없는 삶. 하지만 길 위에서는 온갖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재미있는 세상. 언젠가는 트럭 운전수가 되리라는 꿈을 다시 한번 꾸게 됐다. 올해 안에 면허를 따야겠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서태지, 아니 태지오빠는 로얄이가 유년시절을 함께 뒹굴면서 보낸 존재다.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태지오빠, 태지오빠" 노래를 부르고 다녔으니, 20년 넘는 세월동안 태지오빠 목소리를 듣고 태지오빠 얼굴을 보고 서태지와 함께 자란 셈이다. 당시에는 어떨 땐 우악스럽기까지한 언니들이 무섭고 또 지하철 타는 법도 몰랐기 때문에(;;) TV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돌려보고 또 돌려보고 없는 용돈 모아서 잡지 사고 브로마이드 모으고 테이프를 주구장창 들었다. 그래서 노랫말 하나하나, 드럼이든 베이스든 음 하나하나를 모조리 기억했다. 오늘도 박자 하나 안 틀리고 서태지와아이들 시절 곡을 기억했던 걸 보면 참 많이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공연이 열리는 잠실 주경기장에 들어서서 보니 어쩐지 좀 ..
나는 우연히 삶을 방문했다... 죽으면 나는 개의 형제로 돌아갈 것이다 영혼도 양심도 없이 짖기를 멈추고 딱딱하게 굳은 네발짐승의 곁으로 그러나 나는 지금 여기 인간 형제들과 함께 있다 기분 좋은 일은 수천 수만 개의 따뜻한 맨발들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두꺼운 책을 읽을 때에 나의 눈동자에 쿵쿵쿵 혈색 선명한 발자국들이 찍힌다는 사실 나는 왔다 태어나기 전부터 들려온 기침 소리와 기타 소리를 따라 환한 오후에 심장을 별처럼 달고 다닌다는 인간에게로,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을 던져보자 두 개의 심장을 최단 거리로 잇는 것은? 직선? 아니다! 인간과 인간은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는다 사랑의 수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우주에서 배꼽으로 옮겨온다 한 가슴에 두 개의 심장을 잉태한다 두 개의 별로 광활한 별..
작년 하와이에 갔을 때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풍광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여유가 넘쳤다. 한가로운 와중에 휴양지는 북적여서 마음이 괜히 설레였고 음식들도 맛있어서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한 기분이었다. 차를 달리면 쌍무지개가 뜨고 해는 쨍쨍하고 아침 저녁은 선선했다. 하와이 공항이 있는 오아후 섬은 어디서 출발하나 한 시간 반 이내로 닿을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짧은 일정인데도 섬을 한바퀴 다 돌았다. 그게 참 좋았다. 그런데, 그게 참 좋았는데 그 섬에 머무른지 한 일주일이 지나면서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세계 어딜 가든 5~6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 곳, 하늘길이 막히면 도저히 나갈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종의 감옥 아닌가. 한 시간만 차..
솔로몬 노섭(노예명 플랫)은 "나는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노예로 끌려가 12년을 고생하게 되는데, 그가 그 끔찍한 노예제를 벗어나게 된 유일한 수단이 '자유인' 증명서라는 게 아이러니다. 플랫이 다시 솔로몬 노섭이 되던 날, 동료 노예이자 주인의 성적 노리개이자 집착의 대상, 그리고 안주인의 질시의 대상인 펫시가 플랫을 꼭 안고 가장 먼 발치까지 나와 그를 배웅한다. 그 농장에서 가장 가여운 인물이다. 이제는 솔로몬이 된 그가 자신들을 해방시켜주러 다시 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노섭은 원래 가난한 흑인으로 굶주리며 사는 것보다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주인 밑에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12년간 노예 생활 이후에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는데,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