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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노트

토지, 박경리

로얄곰돌이 2023. 11. 22. 01:29

나름 책 읽는 걸 즐기고, 특히 소설을 좋아한다면서 토지를 읽을 생각을 그동안 왜 안 해봤는지... 내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소설을 이제서야 만났다. 

시작은 올해 1월 황작가 제안이었는데, 별 생각없이 도서관에서 1권을 빌렸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흠뻑 빠져들었다. 엄마, 아빠 차례대로 병원 입원하셨을 때 보호자로 있으면서 1부를 거의 읽었고, 제일 많이 읽은 장소는 지하철이다. 신림동까지 오가는 길이 1시간 정도 걸리니까 책 읽을 시간이 충분해서 좋았다. 물론 글이 흡입력이 너무 좋아서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몇 번 있고 내려서 플랫폼에서 읽다가 학원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뛰어간 적도 있지만.. 6월부터는 공부를 좀 더 하려고 읽기를 중단했다가 시험 끝나고 다시 이어서 읽었다.

20권이라 부담스러워 보이지만 내용이 워낙 흥미진진하고 이야기가 거침없이 흘러가서 책장을 넘길수록 남은 분량이 줄어드는 게 서운할 정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터지는 사건 사고들, 인연과 악연, 정세 변화, 예쁘거나 밉거나 안타깝거나 웃긴 인간 군상들이 지껄이는 말이나 행동들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시작부터 별당아씨가 하인이랑 야반도주를 하는데 재미가 없을 수가... 

이 소설이 너무 신기한 건 눈은 글자를 읽고 있는데 어느새 눈 앞에 스크린이 하나 탁 켜지면서 거리 풍경이나 사람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이다. 박경리 작가님의 세밀한 묘사를 읽으면 자연스럽게 시각화가 되는데, 이 정도로 글을 읽으면서 선명하게 공감각이 살아나는 경험을 해 본 일이 있었나 싶었다. 실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색을 많이 하지 않고도 곧바로 영상 제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5부니까 20회씩 5시즌제로 제작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특히 소설 속에 묘사된 풍경, 사람들 차림새 같은 것들도 소설 속 묘사대로 살리면 정말 멋질 듯. 특히 서희 집(최참판댁, 최부자댁)을 그대로 재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87년도 드라마가 거의 소설 내용을 그대로 옮겼던데 요즘 같은 스타일로 좀 더 스펙타클을 살려주면 좋겠다. 2004년 드라마는 내용을 많이 삭제해서 또 아쉽고)  

소설은 경남 하동, 중국 용정, 서울로 배경이 나뉘었다가 서희가 진주로 귀향(금의환향) 하면서 조선 전역, 만주, 동경을 넘나들면서 이어진다. 시대적으로는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었고, 조선 말기 한일 합방 때부터 독립까지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다. 반상 구별이 흐릿해지는 혼란의 시대, 식민 지배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는다면 토지만한 답이 있을까. 농민, 지방 지주, 서울 지식인 나부랭이, 중국으로 넘어간 동포들, 귀족, 친일파, 뱃사람, 산사람, 유랑극단, 상인, 밥집이나 술집 주인, 사업가, 학생 등 온갖 사람들이 저마다 캐릭터를 뽐내고 각자 태어난 곳의 사투리를 쓰면서 소통한다. 인간들은 끊임 없이 흘러다니면서 뭔가를 선택하고, 운명에 이끌리고, 아프고 괴롭고 기쁘고 즐겁게 살려고 버둥댄다. 그런 몸부림이 나비효과가 돼서 하동에서 일어난 일이 중국으로 번지고, 중국에서 일어난 일이 진주로 번지고, 서울서 일어난 일이 하동, 통영, 부산으로, 동경으로 번진다. 

평사리 사람들이랑 거의 1년 가까이 울고 웃고 하다보니 나도 꼭 그 동네 사람인 것 같고, 같이 풍파를 겪은 것 같다.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다보니 늘상 혼자 있어야 하는 수험 생활도 그렇게 외롭지 않았다. 토지 덕에 2023년 한 해를 잘 보냈다. 박경리 작가님, 엄혹하고 서러운 시절을 살다 간 평사리 사람들, 하늘에서도 평안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