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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노트

장애시민 불복종

로얄곰돌이 2023. 10. 12. 01:37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있는데요, 여러분의 인내 덕분에 이 사회가 여기까지 바뀔 수 있었습니다. 시민 여러분이 여기까지 참아주신 덕분에 한국 사회에, 서울 지하철역 엘리베이터가 91퍼센트 상당까지 설치되었고, 서울 시내 저상버스가 55퍼센트 상당 설치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장애인들끼리 정치인을 찾아가서 '엘리베이터, 저상버스 설치해주세요'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감하는 시민께서 함께 불편함을 호소하고 빨리 처리하라고 요구하는 순간부터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정말 딜레마이고 죄송할 다름인데요... 그럼에도 시민 여러분이 불편함을 감수해주신 덕분에 한국 사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감사의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장애시민 불복종> 223p.

이 인용문은 변재원씨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에서 약 500일간 활동하면서 겪었고 생각한 바를 엮은 책 <장애시민 불복종>에 나오는 내용이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장애인들이 왜 법을 어깁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한 것이다.

변재원씨는 이 방송 출연 전 미리 질문지를 받아보고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마틴루터킹, 박근혜 정권 탄핵 촛불 집회 등 불법의 낙인을 감내해야 했던 사례들 그리고 정치철학자 존 롤스와 위르겐 하버마스 등의 시민불복종 사례 등을 떠올리며 불법 시위의 정당성에 대한 이론과 근거들을 당장 떠올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랜 고민 끝에 어떤 변론도 시위자에 대한 짜증을 해소시킬 수 없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냉철한 이성으로 사안을 바라보는 것과 당장 출근 시간에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내 앞 길을 막는 '어떤 존재'에 대한 불쾌감 또는 증오심 같은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니까. 

라디오 청취자 중 몇 사람은 전장연의 활동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고쳐먹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법을 지키는 게 맞다, 나쁘다, 정당하다는 논박을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조금씩 양보하고 짜증나는 상황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라고 아주 알아듣기 쉽게 알려주고 있었다. 아, 치밀한 논리 구성과 근거, 데이터를 동원한 팩트 체크 같은 것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전장연의 투쟁의 역사이자 전장연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다. 교장 말고 '고장'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걸 좋아하는 싸움꾼 박경석 대표, 전동스쿠터를 타고 문 밖을 나서면서 투쟁의 역사를 20년 넘게 쓰고 있는 이규식 활동가, 세종시를 지키는 문경희 활동가, 흐느적거리며 싱긋 발음되는 "투쟁입니다, 투쟁"을 말하는 박옥순 활동가, 구치소까지 가는 오르막을 힘차게 올랐던 권달주, 이형숙, 최용기 활동가와 치료비 지원을 위해 직접 나선 노금호, 이형숙 활동가, 날카로운 말은 쓰지 않도록 하는 박옥순 활동가 등 자신과 장애인들의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거리에 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변재원씨가 활동가가 되면서 겪었던 탐색-직면-이해-연결의 의식의 변화와 이 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서사를 쫓아가다보면 장애시민이 불복종에 나선 이유와 의미를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다양한 투쟁 방식을 통해 세상을 사는 이치에 조금은 접근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들이 부단하게 알리고, 설득해보고, 도와달라 호소도 해보고, 즐겁게 연대한 덕분에 사회 저변의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고 장애인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약자들이 하는 투쟁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p.s 박옥순 활동가에 대한 내용은 두고두고 곱씹어 보려고 한다. 박옥순 전장연 사무총장은 행복하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상대에 대한 평가, 비난, 명령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무례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해서 회의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그동안 직장생활하면서 비판을 빙자한 비난이나 독설이 난무하는 상황이 참 많았는데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싶다. 나도 앞으로는 존중하는 대화, 비난하지 않고 발전적으로 이끌어가는 대화를 해야겠다고 거듭 맘을 먹게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