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원더보이, 김연수 본문
원더보이를 읽고 이 시대 최고의 작가를 꼽으라면 김연수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80년대 중반, 주민 여럿을 살해한 강도의 차가 정훈이 아빠가 운전하던 차를 들이 받았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사망, 권력에 욕심이 있던 권대령이라는 작자는 그 강도를 간첩으로, 살아난 정훈이를 원더보이로 만든다. 정훈은 그 사건 이후로 사람들의 생각이 들리기 시작하고, 이 때문에 매일 고문 당하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세상의 끝, 여자친구에서 작가는 소통, 그러니까 고통까지도 이해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썼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때 사람 사이 진정한 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코미디언의 발자취를 추적해 간 딸과 장님의 말을 통해 어느정도 고통에 대한 이해해 다다른 김연수는, 이제는 본격적으로 고통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다. 아니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정훈을 통해 좀 더 알아보려고 한 것일 수도.
웃다가 울다가 또 울다 웃다 문득 내가 조금 자랐음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울보 정훈이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자기 본래의 모습을 만나려면 이 세계 바깥으로 나와야만 해. 이 세계가 우리를 붙들어매는 힘은, 즉 카르마의 중력은 집착이야. 희로애락들, 우리를 울고 웃고 화내고 슬퍼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집착들, 감정의 불을 끄고 그 일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 현실의 중력장은 붕괴되지. 마스터 피터잭슨은 손바닥을 펼쳤다. 여기에 사과 한 알이 떨어져 있다고 상상하자. 이 사과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나는 빨갛게 익어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상상했다. 어두운 길 위에 떨어진 그 사과는 바로 나였다. 나는 마스터 피터 잭슨의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이 사과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다면, 너를 둘러싼 이 세계의 중력은 사라지고, 결국 너는 하늘을 날게 될 거야. 92p.
그리고 이건, 정말 받고 싶은 러브레터의 전형이다.
가을이 계절의 무대에서 내려가고 나자, 막간극에 나온 피에로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11월이 찾아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하얀 입김을 토해내며 뒷산에 올라가노라면 무대로 바짝 내려온 커튼처럼 두터운 안개가 계곡 쪽의 집들을 뒤덮은 풍경이 보입니다.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죽어야만 하는 귀뚜라미처럼, 불현듯 뒷모습을 보이는 가을이 못내 서운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초록빛을 잃어버린 산들처럼, 어스름 무렵이면 농가의 굴뚝에서 솟구치는 외줄기 연기처럼 나는 내 마음 속 가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의 그리움만큼 외로워집니다. 말라가는 시냇물처럼 내 말수는 줄어듭니다. 가난한 내 언어의 재산목록에는 보고 싶다는 말, 그저 보고 싶다는 그 말만 달랑 남았을 뿐입니다. 오늘도 노을이 지는 저녁 하늘로 새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습니다. 당신이 오지 않으니 새를 잡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속히 돌아오세요. 연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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