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본문

감상 노트

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로얄곰돌이 2012. 7. 26. 22:27

-김훈 선생은 겨울만 되면 훗카이도에 갔을 때의 일화를 말씀하시곤 한다. "겨우내 눈이 몇 미터씩 쌓이지." 거기까지는 나도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계속되는 말씀이란 "그래서 사람들은 땅굴처럼 눈을 파면서 술집을 찾아다니지. 그 굴을 따라가다 보면 한 쪽에 등불이 켜져 있는데, 거기가 바로 술집이야. 술집으로 들어가면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샤미센을 치면서 정종을 팔아." 거기까지 들으면 좀 의아해진다. "샤미센을 친다고요?" "그렇지, 샤미센을." 천연덕스럽게 선생은 말한다.

-그 밤에 나는 "인생은 너무나 길어요"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에요." 그런 말도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13년 전에만 해도 나는 2010년이 되어서도 내가 소설을 계속 쓰리라는 걸, 더구나 <7번 국도>를 다시 써서 출판하리라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렇게 독자들과 만나게 되리라는 걸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인생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길다. 그러고 보니 예측한 대로 삶을 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늘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해진다고 한다. 이유는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서로 다른 세상에 살기 때문에. 20대가 사는 세상은 아직 탄생한 지 30년도 지나지 않은 세상이다. 지속 시간이 짧으니 삶에는 인과보다는 우연이 더 크게 작용한다. 하지만 60대가 사는 세계는 벌써 70년 가까이 지속된 세계다. 시간이 그 정도 지속되면 결과를 통해서 원인을 따져볼 수 있다. 젊은이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담배를 피운다고 폐암에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늙은이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수두룩하다. 그러니 두 세계가 다 다를 수밖에. 노인들의 행복은 거기서 비롯한다고 한다. 그들은 예측 가능한 세계에 살기 때문에.

-살아 본 바에 따르면 삶에는 인과관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까지 많은 경험을 해 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까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그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봤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먼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하면 그 순간 자신에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즐거움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고 나면 그 순간들이 한없이 그립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과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보여줄 수 있다는 것. 한없이 투명해진다는 것. 그 누구 앞에서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는다는 것.

 

작가가 가장 짜릿함을 느끼는 순간은 자기가 쓴 글을 읽은 독자가 무언가 행동했을 때라고 하던가. <지지않는다는 말>을 읽고 난 다음날 새벽 일어나서 무작정 달렸다. 고통이 가슴에서 시작해서 허벅지로, 종아리로 옮겨다니는 걸 느끼던 그 아침은 정말 즐거웠다.  방사능 위협만 없다면 겨울에 훗카이도에 다녀올텐데... 히말라야랑 베를린에 다녀오고 난 뒤 '기필코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 목록이 비어 있었는데 하나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