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배신, 바러라 에런라이크
선물 해 준 사람이 써 준 메시지가 감동적인 책.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중년에 이른 기자로, 1990년대 말 직접 '워킹 푸어'의 삶 속에 들어가서 그 체험기를 생생하게 적어낸다. 그리고 미국에서 보장하는 최저임금제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조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 저소득층의 빈곤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 저소득층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한겨레21에서 기획으로 내보냈던 '노동 OTL' 시리즈의 원형 정도 되겠다. 워킹 푸어의 문제점에 대해 익히 들어 온 사람으로서는 읽으나 안 읽으나 예상 가능한 뻔한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책을 읽으면서 종종 전율을 느꼈다. 작가가 묘사한 저소득층의 삶은 아무리 알고 있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괴로운 감정을 주는데다 그 세계에 섞여 들어간 상위 20% 내에 드는 식자층의 이율배반적인 감정까지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때 워킹푸어였지만(그나마 일찌감치 수도권에 터를 잡은 부모님을 둔 게 행운이었다고 할까!) 이미 그 시절의 일은 기억의 한 구석에 밀어놓은 지 오래고 우리 회사 청소하시는 분들께 인사 잘 하고 그 분들 식사 장소 챙기는 정도로, 지하철이나 보도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푼돈이나 쥐어주는 걸로 죄책감을 덜고 있던 참이었다. 심지어 우리 엄마가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고된 노동을 했던 게 불과 몇년 전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릴 지경.(그 힘든 일을 하고 벌어 오셨던 돈 100만원 남짓으로 우리 5인 가족이 먹고 산다는 건 실제로 불가능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미국 내에서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에 쓴 마지막 덧붙이는 말에서 저자는 더욱 나빠진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저소득층은 바버라가 일 할 당시에도 최소한도로 썼던 의료비, 식료품비를 더 줄였고, 복지 제도 역시 축소돼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국 최저임금, 비정규직의 삶도 다르지 않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역시 비슷하다. 더 떨어질 지 모른다는 공포는 구조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있다는 자각을 마비시키고, 자본의 권위에 복종하게 만든다는 것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생각나서 찾아보니 올해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4580원이다. 하루 8시간 일한다 치고 주말 8일 제외하고 한 달에 22일 일해서 버는 돈은 80만6080원이다. 요즘 서울 시내 원룸 월세 임대료는 대략 1000에 30~40 정도, 여기서 적게 쳐서 30만원을 제하고 나면 약 5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내야 한다. 관리비, 의료비, 식비, 의복비가 다 포함되고 야구장에 간다거나 공연장에 가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수준이다.(아이러니한 건 부자이거나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공연장이나 야구장에, 그것도 좋은 자리에 무료로 입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198p.
은밀한 갈등을 올바른 사고와 긍정적인 태도로 극복한다는 주제를 다룬 '당신은 정말 좋은 직장을 선택했다'라는 제목의 12분짜리 비디오를 봤다. 이 비디오에서는 다양한 '동료'들이 '월마트의 유명한 가족적인 분위기'를 증언하면서 우리에게는 노조가 필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주 오래 전 한때는 미국 사회에 노조가 설 자리가 있었지만 이제 노조는 하락세다. 그러니 스스로 판단하라. 그러면서 우리에게 "노조들이 수년 동안 월마트를 공략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왜냐고? 물론 조합비 때문이다. 노조로 인해 당신들이 손해 볼 것을 따져 보라. 첫째, 당신이 납부해야 하는 조합비가 매달 20달러에 이를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훨씬 더' 나갈 수도 있다. 둘째, '당신의 소리'가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노조가 당신을 대신해서 말하게 될 테니까. 마지막으로, 당신의 임금과 기타 혜택을 모두 잃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협상 과정에서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 그렇다면 노조 창립자 같은 악당들, 그런 명백한 착취자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 땅위를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33p.
트윈시티 지역의 닷컴 부재현상을 한탄하는 기사들을 보고 이곳은 캘리포니아 만 지역처럼 급격히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소득 서민층의 생활 기반을 흔들어 놓는 것이 닷컴의 돈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었다. <파이어니어 프레스>는 주택 도시개발부 장관 앤드루 쿠오모가 한 말을 인용해 경제번영 때문에 전국적으로 저렴한 주택시장이 점점 축소되는 현상이 초래되는 '잔인한 아이러니'를 한탄했다. "경제가 좋아질수록 임대료 상승에 대한 압력도 강해진다" 따라서 나는 빈곤의 피해자가 아니라 '번영의 피해자'인 셈이었다. 일반적으로 빈자와 부자는 한 쪽은 저가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다른 쪽은 저임금 직장을 제공하면서 조화롭게 상호의존하며 살고 있다고 인식되는데, 이제 더 이상 그렇게 공존할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280p.
노동자가 행동하기를 꺼리게 만드는 것 중 한가지는 직원을 '동료'나 '팀원'이라고 지칭하며 조직 속으로 흡수하려는 경영진의 권력이다. 더 메이즈에서는 사장이 우리 중에 유일한 남자였고 좀 저급한 가부장적 권력을 행사했는데, 그는 내 동료들 중 일부를 설득해 자기가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직원들은 끝없는 인내로 보답해야 마땅하다고 믿게 만들었다. 월마트는 노동자들을 '동료'처럼 느끼게 만드는 보편적이고 아마도 더 효과적인 방법을 몇 가지 사용했다. 그 중에 하나로 '이윤 나누기 설계도'라는 것을 휴게실 가까이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월마트 주식 가격과 함께 매일 새로 붙여 놓았다. (중략) 자신을 회사나 상사처럼 힘 있고 부유한 존재와 동일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노동자를 유인하는 당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