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노트

생각의 좌표, 홍세화

로얄곰돌이 2012. 10. 25. 15:33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요즘들어 느끼는 감정은 '아득함'이다. '막막함'으로 바꿔 써도 되는 단어이긴 하지만 굳이 이 낱말을 골랐냐 하면, 목표까지 닿기에는 너무 많은 험한 산이 굽이굽이 앞에 서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그걸 넘을 걸 생각하니 팽창하는 우주의 끝에 가 닿을 수 있는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불안하기 때문이다. 고래로 우리 인류 역사 속에 함께 잘 살고, 모두 행복했던 순간이 있기나 있었나 싶다. 그런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게 진보라면, 결국 인간은 진보하고야 말 거라는 막연한 희망 한가닥 부여잡고 가는 게 잘 사는 일인가?라는 의문도 든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매트릭스 밖, 차갑고 고독한 구닥다리 기계 속에 몸을 뉘이며 안락했던 생활을 그리워하는 존재로나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거창하게 썼지만 간단하게 말해 세상이 양극화 되고 물신이 지배하고 또 주변 사람들이(나 또한) 휩쓸려 가는 상황이 마음이 편치 않고, 달갑지도 않고 뭔가 바꾸고는 싶은데 생각대로는 안 되니까 답답하다는 얘기다.

 

마침 로얄 탄신일을 맞아 홍세화 에세이 <생각의 좌표>를 선물 받았다. 작가는 이같은 심정을 '쓸쓸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고독감을 채워주는 건 역시 세상은 변할 거라는 긍정적인 믿음인가보다.

 

이 책을 읽고 한 선배랑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에세이를 읽는 게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바로바로 적용하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예전에는 나와 다른 관점으로 책을 읽어내는 사람들의 의견이 재미있었는데 요즘에는 같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 반갑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줄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고, 내 생각의 방향을 정했다. 문제가 있을 때는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되 인간성과 진정성을 잃지 않는 것, 방향을 정하고 뚜벅뚜벅 나아가는 것, 이게 우리 '불온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 같다. 홍세화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니 '존재에 반하는 의식은 갖지 말고, 의식을 배반하는 행동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적극 공감한다.

 

국가주의 교육이 여전히 관철되는 한국의 각급 학교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존재와 아무 상관 없는 의식, 나아가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는 장이다. 노동자와 농민, 서민의 자식은 계층 상승의 기회를 위해 학교에 다니지만 절대 다수는 계층 상승 대신에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한다. 자기 돈 들여서, 차라리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존재에 상응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존재의 요구를 스스로 거부하는 의식은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75p.
회색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중립'이라는 멋진 수사의 혜택을 입어 양쪽의 권리를 누리며 어느 한 쪽의 책임도 지지 않는다. 불온이 오히려 교양이며 상식인 사회에서 몰상식의 중간은 몰상식일 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하듯 '중도 실용'을 내세워 명분과 실리를 함께 취한다. 중간파들이 균형을 주장하는 것은 대개 명분과 실리를 함께 취하려는 포장술이지만 지식인들조차 이를 역학관계나 현실의 이름으로 합리화한다.(중략) 그래서 나에게 실용이란 항상 이기는 쪽에 붙어 명분도 채우면서 권력도 맛보려는 처세술이다. 113p.

앞으로 이 보잘것없는 사회에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청소년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중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하나는 이 보잘것없는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보잘것없지만 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이 사회는 그대에게 이 사회에 맞서서 발언하고 행동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또 하나는 이 보잘것없는 사회가 인정한 그대의 능력이란 게 '당연히' 보잘것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스스로 보잘것없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125p.

18세기에 볼테르는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런 일이지만, 지혜를 가진 사람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런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라는 말로 근대 시민의 자격 요건을 제시하였다. 183p.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 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22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