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우리도 다는 모르지, 그냥 나쁘다고는 알고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 우리 업계는 딸을 많이 낳는다는 것도 화학물질을 많이 써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어요."
예전에 반도체 공정 분야에서는 꽤 유명한 반도체 대기업 부사장이랑 얘기나눌 일이 있었는데, 아마 삼성전자가 백혈병 피해자 문제에 대해 어떤 액션을 취한 날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반도체 공장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묻는 질문이 나왔고 위와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모두가 알고 있고 좀 찝찝하긴 하지만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 또 바쁜데 안전 규칙 다 지켜가면서 일 할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변명을 포함한 발언이었는데, 역시 그 말 속에 답이 다 들어 있었다.
지난주 오랜만에 강남역에 갔다. 작년부터 이러저러한 이유로(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쪽은 일부러 피했는데, 못 가본 사이에 반올림에서 작은 농성장을 차렸다.
반올림이 출범한지 벌써 10년, 그동안 돌아가신 분들이 76명에 달한다. 그동안 산재로 인정받은 경우도 있고, 입증을 못해 인정받지 못한 사례도 있다. 농성장 앞에 걸린 현수막에는 직업병 때문에 돌아가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다.
반올림 농성장을 찾은 날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내용이 좀 기가 막혔다. 반올림과 후원 기관들은 몇몇 언론사를 고소하겠다고 발표했다.
들어보니 활자화 됐다는 내용도 참 가관이다. '단체의 이익과 지속을 이유로 협상을 방해한다', '아픈 딸 반올림에 볼모로 잡혀'라느니 악의적인 표현들이 상당수 들어가 있었다. 반올림이 탄생한 이유와 그간 진행해왔던 일들을 제대로 들여다 볼 시간이 없었다면 오히려 침묵한다는 비판을 받더라도 기사를 안 쓰는 게 맞다.
기자회견을 보면서 잘됐다(꼬숩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참으로 슬펐다. 누구든 가족이 희귀병에 걸려 죽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서 원인을 찾고 억울한 일이 있다면 그걸 풀어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가까스로 그 실마리를 찾은 사람들에게, 또 여러 단서를 들어 대단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 산재 인정만 해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건가.. 이런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 활동가들이 단체의 지속을 위해야 할 이유는 뭔지 묻고 싶다. 반올림 활동가들은 노무사, 변호사, 의사 등 직업이 있는 사람들인데, 돈도 안 되는 이 단체를 굳이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시오?
기자가 뭔가 싶고 언론은 다 뭔가 싶다. 세상은 도대체 어쩌다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