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어릴 때 이 공연을 봤더라면... 안드라스 쉬프 리사이틀 본문
안드라스 쉬프 경 리사이틀은 연주 곡 목록이 미리 공개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연주회장, 그 날의 분위기 등을 보고 피아니스트가 당일 연주곡을 결정하고, 공연 중에 곡명과 작품들에 대한 느낌이나 감상 포인트를 직접 설명해준다. 작년부터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이번에 한국 순회 연주를 한다고 해서 경기아트센터에서 하는 10월 6일 공연을 관람했다.
헝가리 태생에 이탈리아 피렌체에 살고 있는 쉬프경은 안타깝게도 한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문지영 피아니스트가 통역을 해줬는데 오히려 좋았다고 해야 하나, 문 피아니스트의 음악에 대한 느낌과 감상까지 함께 전해져서 이해도가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이 날의 연주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피아노 꿈나무 옆에서 등을 토닥여주고 응원해주는 공연이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왜 이렇게 재미 없는 바흐를 시키는지 1분마다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는 어린이, 도돌이표는 그냥 없는 기호인 셈치고 곡을 끝내는데 급급한 어린이, 피아노 부서져라 우당탕탕 발트슈타인 도입부를 시작해 본 어린이라면, 모차르트 소나타 16번 K.545를 신나게 쳐봤던 어린이라면 연주회 다음날(마침 토요일!) 아침부터 일어나서 피아노 연습에 몰두하지 않았을까?
연주가 이어지면서 로얄이의 눈 앞에는 어느덧 어린 시절 피아노학원, 업라이트 피아노 한대와 나만 존재하던 그 조그만 연습실 풍경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바흐 인벤션, 신포니아가 너무 싫어서 한 번 치면 동그라미를 두 개씩 지우던 기억도 나고. 이런 아름다운 바흐를 그 시절에 경험 했더라면... 피아노를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즐거운 연주자가 되었을 것 같다. 작곡가의 의도에 좀 더 귀 기울여 보고, 피아노를 칠 수 있는 환경과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에 좀 더 감사했을 것이다. 공연장에 어린이나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엄마랑 같이 온 모습이 종종 보이던데, 쉬프 경이 이런 관객들을 위한 선물을 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추측해본다. 공연 시작 첫마디가 한국에는 젊은(어린) 관객이 많아서 좋다는 내용이었던 것도 그냥 한 말은 아닐테고.
이미 많이 늦었지만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나도 피아노 뚜껑을 열고 때묻은 바흐 인벤션 악보를 꺼내고, 또박또박 연습을 해봤다. 이미 내 손가락은 굳어버려서 억지로 연습하던 그 시절보다 더 버벅대긴 했다만, 인벤션과 신포니아를 익히고 평균율도 치고... 종국에 언젠가 골드베르크 협주곡을 완성해보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대장정에 나서는 어린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1부
바흐 신포니아 F단조 BWV971로 시작, 설명 없이 2분 정도 되는 곡을 정말 발랄하게 연주했는데 무슨 곡을 들을까, 혹시 내가 아는 곡이 하나도 안 나오면 어쩌나 하던 긴장감을 살살 녹여주는 터치였다. 그리고 바로 바흐 인벤션 BWV772~786 15곡 전곡 연주. 바흐는 이렇게 치도록 연습해보세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바흐 이탈리아 협주곡 BWV971. 당대 이탈리안 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안 형식으로 돼 있고, 독일 밖을 구경해본 적이 없는 바흐지만 이탈리아의 햇빛을 표현했다고.
1부 끝으로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 중 24번, 프렐류드와 푸가 B단조와 모차르트 아다지오 B단조 K540을 연달아 연주했다. 프렐류드와 푸가 B단조는 이탈리아협주곡과 대조적으로 '검은색'을 표현하는 곡이고, 마테수난곡과도 관련이 있다고. 모차르트 아다지오 B단조는 모차르트의 유일한 B단조곡으로 주변 사람들을 떠나보낸 괴로움을 표현하는 곡이고, 쉬프 경은 모차르트는 본인이 단명할 것을 예감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울한 인터미션 전에는 우울한 곡들로... 우울한 곡들인데 귀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2부
하이든 C단조 소나타 Hob. XVI:20. 안드라스 쉬프 경은 하이든을 엄청 사랑하고, 저평가된 음악가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1부에서는 페달이 없었지만 2부에서는 페달을 풍부하게 사용했는데, 하이든 소나타는 포르테 피아노를 위한 셈여림 기호가 쓰여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도돌이표가 많은데, 이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고 연주자들은 도돌이표를 연주할 때 다른 연주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했다. 그래서 반복되는 구간 연주를 좀 더 집중해서 들어보려고 했더니 좀 더 연주가 참 풍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베토벤 소나타 51번 Op.53 발트슈타인. 발트슈타인을 실연으로 보게 되다니.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실제 연주를 듣기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 들을 수 있어서 정말 눈물 나게 좋았다. 쉬프 경은 발트슈타인 도입부는 멜로디가 아니라 리듬으로 연주하는 곡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처음부터 등장하는 둥둥둥둥 둥둥둥둥 빠 바라밤~ 부분의 강약을 퍼커션처럼 세밀하게 조절해서 치는 연주를 보여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곡을 들으면서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스며나왔다. 귀에 익은 곡이라도 가슴에 남는 울림이 참 다르다.
앵콜은 바흐 평균율 클라이버곡집 1권 중 1번, 모차르트 소나타 16번 중 1악장,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바르톡의 론도 C단조 4곡이나 들을 수 있었다. 앵콜까지 후한 연주자 사랑합니다!
2층 A구역 1열에서 봤는데 시야도 확 트이고, 소리도 한 음 한 음 선명하게 들렸다. 경아센이 음향 문제가 좀 있다고 하던데 막귀라 그런가? 전혀 못 느끼고 또랑또랑한 음향 그대로 들려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감상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지, 박경리 (2) | 2023.11.22 |
---|---|
장애시민 불복종 (2) | 2023.10.12 |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0) | 2022.11.17 |
미래를 낙관하면, 오늘 세계는 달라진다-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2) | 2022.11.10 |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0) | 2022.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