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박경리 작가의 연애 소설 본문
박경리 초기 작품들을 읽고 있다.
첫 장편인 <애가>는 전쟁통에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와 동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인 진수가, <표류도>에는 전쟁을 겪으며 사실혼 관계에 있던 남편이 죽고 사생아를 낳고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다방 마담이 된 현회가 등장한다. <파시>는 전쟁 중 피란을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가 통영에서 겨우 의지할 곳을 찾았지만 그 집 부인에 의해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여성 수옥의 서사와 자살한 엄마를 둔 자식이라는 이유로 애인의 아버지의 반대에 부닥친 명화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이어진다.
자전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불신시대>나 <시인과 전장>에 나와 있듯 박경리 작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대학을 나올 정도로 인텔리였으나 전쟁통에 남편을 잃고, 그 이후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전쟁 미망인으로서, 식솔들을 먹여살려야 했던 가장으로서 어려웠던 그의 삶은 여러 소설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래서 소설들은 표면적으로 남녀간의 연애사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그 본질은 여성에 대한 다양한 사회적 억압과 그런 억압을 딛고 결국 주체적이고, 의지적으로 삶을 살아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작품들을 거의 연달아 봤더니 공통적으로 읽히는 것들이 있다.
일단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애가>는 이를테면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데,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은 거의 삼각관계로 얽혀 있고, 전국 어딜 가든 주인공들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ㅋㅋㅋ 여기에 불륜과 자살을 끼워 넣어서 엄청 자극적이다. 박경리 작가 특유의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세밀한 묘사까지 더해지면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달까. <표류도>는 다방과 불륜, 생활고, 타락해가는 여성이 양념처럼 뿌려지고, <파시>는 인신매매, 밀수, 폭행 사건, 신분의 벽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곳곳에서 신경을 자극해준다.
또 하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1950년대 여성상을 과감하게 깨어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나는 예전이라면 여성드에게는 정숙함만 강요됐고, 그렇게들 살았을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박경리 소설에는 그런 여성상을 벗어난 다양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전쟁 폐허 속에 '내조를 잘 하는 정숙한 가정부인'이라는 이상적인 상을 실천하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이 받쳐주는 여자가 얼마나 됐겠냐 싶다. 스스로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들은 역사 속에서 소거됐을 뿐. 박경리 소설이 이런 여성들을 디테일한 묘사로 살려내 줬기 때문에 후대의 나같은 독자도 그들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또 하나의 볼거리. 고관대작부터 하층민까지 다루는 인물들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이런 넓은 시선으로 소설을 써 왔기 때문에 <토지>같은 대작이 나올 수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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